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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 눈 뜬 자의 윤리로 눈 먼 자의 행위를 심판할 수 있는가

by 늙은소 2009. 1. 8.

눈먼자들의 도시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08 / 캐나다, 일본, 미국)
출연 줄리안 무어, 마크 러팔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대니 글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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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느 도시의 하루. 신호를 기다리던 차량 속의 한 남자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실명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선다. 빛이 존재하지 않아 어둡기만 한 실명과 달리, 이 남자는 우유에 빠진 것 같은 백색의 실명상태에 처해 있다. 당황한 그는 자신의 집을 찾아가려 하지만, 그를 도와준 행인은 포장된 선의를 배반하며 남자의 차를 훔쳐 달아난다


눈이 먼 남자를 진찰한 안과 의사와 안과에서 진료를 기다리던 환자들이 차례로 눈이 멀게 되면서 도시는 전염병처럼 번지는 실명에 대해 격리조치를 선포한다. 폐쇄되었던 정신병원이 수용소로 지정되고, 당국은 전염된 환자들을 찾아내 하나 둘 시설로 이송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안과의사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하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이 실명임을 주장하며 남편과 함께 수용소로 향하고, 그곳에서 벌어질 참상을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로 남게 된다


최초로 눈이 먼 남자와 그의 아내, 그의 차를 훔친 도둑과 안과에서 진료를 기다리던 환자들이 의사 부부와 함께 한 자리에 모이고 다시 새로운 환자가 수용소에 유입되며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문명인으로서의 자존감을 포기하는 단계에 직면한다. 배급된 식사를 정해진 양 만큼 배분하는 것에서부터 갈등은 시작된다. 또한 음식을 먹고 배설 하는 최소한의 행위마저 사회적 기준을 이탈하기 시작하며 수용소는 인류가 긴 역사를 거쳐 쌓아온 도덕과 윤리, 가치관을 허물어트리는 잔혹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여기에 총을 소지한 눈먼 자의 등장으로 폭력과 강탈, 집단 강간이 방관되는 가운데, 의사의 아내는 사회가 존속되기 위해 요구되었던 가치들이 한 순간에, 너무나 손쉽게 파괴되는 과정을 목도한다.

수용소의 화재로 자유를 얻게 된 눈먼 자들은 병원 바깥으로 나오고, 의사의 아내는 몇 사람의 눈먼 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인도한다. 수용소 바깥의 사람들까지 모두 실명하게 되어 도시는 이미 오물과 시체로 뒤덮여 있다. 수용소의 삶과 크게 다를 게 없는 도시에서 의사의 아내는 자신을 의지하는 눈먼 자들을 부양하기 위해 식량을 구해오고, 그들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며 자신의 고단한 생과 인류의 절망을 대신해 눈물 흘린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 눈이 멀었던 남자가 시력을 회복하자 이들은 저마다 시력이 회복되리라는 희망 속에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시야와 공간이 제한된 상태에서 집단이 생존을 위해 스스로의 가치를 무너트리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미스트]와 비교할 수 있으며,  1인칭 시점으로 실명을 다룬 영화의 시각효과라는 측면에서 [잠수종과 나비]를 참고해보는 것 역시 가능하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여러 측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집단 내부의 갈등이 (집단 강간과 살인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로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강도는 [미스트]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며, 백색의 실명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상투적인 효과를 반복함으로써 [잠수종과 나비]가 보여주었던 극대화된 사실성과 환상성의 이중적인 태도에 크게 미치는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원작 소설의 압도적인 힘을 영화가 거의 표출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게 다가온다.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독특한 형식을 특징으로 한다. 쉼표와 마침표를 제외한 어떠한 문장부호도 등장하지 않으며, 대화체에 대한 별도의 구분 또한 제공되지 않는다. 지명뿐 아니라 인명, 나이, 인종과 같은 설명이 일체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몰입도가 극대화되는 힘을 발휘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갑작스러운 실명 상태에 처하게 된 인물에 자신을 대입시키거나 그들을 목격하는 유일한 존재인 의사의 아내의 입장에서 공포를 체험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경악하였다. 소설은 그 자체로 눈이 먼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질문하는 자와 답하는 자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고, 인물을 머리 속에서 떠올리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조차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마치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사람처럼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영화로 제작되며 부각된 가장 큰 차이는 모든 것이 화면에 보인다는 데에 있다. 백인인 의사의 얼굴 주름과 집안의 풍경을 비롯해 안대를 한 노인이 흑인이며 처음 눈이 먼 남자는 일본인 중산층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쉼 없이 이들의 인종과 출신 국가, 계급적 차이에 대한 정보를 화면 바깥으로 실어 올린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원작자인 사라마구가 집요하게 이름을 제거한 이 도시의 익명성을 파괴하였고, 그 결과 눈먼 자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듯한 거리감이 유발되었다. 극장 안은 침통해하는 가운데에도 눈먼 자들이 팔을 휘두르며 걷다가 넘어지고,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혼자 떠드는 장면이 나올 때 이들을 비웃는 관객의 웃음으로 채워지곤 하였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내 것이 아닌 비극을 방관하며, “눈이 보이는 자의 윤리눈이 보이지 않는 자의 행위를 심판하게 되는 한계를 안고 있다. 또한 원작소설의 문제점이기도 한 과도한 현실 묘사와 분산된 주제의식을 영화에 그대로 담음으로써 지나치게 많은 사건과 이야기가 전개되었고, 관객에게 생각할 시간을 제공하지 않아 재난영화나 공포영화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지는 결과가 빚어지기도 한다

이 영화가 이야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눈의 소중함이나 희생의 미덕이 아니라, 빛으로 충만한 실명이 무엇을 상징할 수 있는가에 대해 각자의 답을 들어보는 데 있지 않았을까. 빛이 없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물이 빛을 반사하고 있음에도 그 차이를 구분해내지 못하는 형태의 실명에 대하여.


"내가 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때, 나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