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선형적 사유

영화 감상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

by 늙은소 2009. 2. 19.

요즘 DVD를 사모으느라 열중하고 있는데, 문득 2~3년 안에 DVD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되기 시작한다. 옆의 후배에게 어찌될 것 같으냐 의견을 물으니 일단은 블루레이가 들어온 다음 영화도 결국 음악처럼 스트리밍 서비스로 바뀌지 않겠느냐고 답한다. 보고 싶은 영화를 검색한 다음 네트워크를 통해 수신하여 보는 방식. 이미 IPTV가 상용화된 마당이니 홈시어터를 갖추고 검색하여 원하는 영화를 TV로 바로 연결해 보는 것이 뭐 새로운 일이겠는가.

검색하여 영화를 바로 보는 방식이 바꾸어놓을 삶의 풍경은 어떠할까?

'검색 서비스'의 문제는 검색을 하기 위해 최소한의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데 있다. 영화 제목을 알고 있거나, 감독이나 배우의 이름과 같은 핵심정보를 알고 있어야 나는 그 영화를 찾을 수 있다. 20년 전에 TV에서 본 영화인데 제목도, 감독이 누구인지도 모르며 유명한 배우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 영화를 어떻게 찾아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지식검색 서비스는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문장으로 된 질문을 던져 이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지만, 그 질문이 대단히 마이너한 것이어서 보통의 사람들이 알기 어렵다면 영화의 제목은 영영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또 다른 문제점. 특정 영화를 찾아서 볼 경우 취향이 고정될 가능성이 있다. 액션영화만 골라서 보거나 난도질 영화만 찾아보는 사람에게 전혀 다른 종류의 영화를 소개할 수는 없을까?

누군가는 실연한 직후에 보면 좋은 영화를 목록화 하여 그 목록을 네트워크에 띄워놓을 수도 있으리라. 혹은 요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들의 목록이라든가, 비틀즈의 음악을 특히 많이 사용한 영화리스트는 어떠할까? 특정 목적 하에 결과를 불러오는 '검색'과 달리 이런 목록과 접근방법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낯선 영화를 만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A감독의 영화 'ㄱ'에 대한 오마주로 제작된 B감독의 'ㄴ', 다시 이 영화에 대한 오마주로 만들어진 'ㄷ'.. 이런 순서로 영화를 감상해보는 것도 좋겠다. 영화와 영화 사이에 풍부한 링크가 끼어들어야 하며, 모든 영화는 보다 다양한 관점의 태그(키워드)를 소유해야만 한다. 제목, 감독, 장르, 배우, 스텝의 이름과 같은 지금의 키워드는 너무 제한적이다. 편집과 앵글, 음악, 색채, 세트 디자인, 아트웍, 특정 장면이나 효과 등등 영화와 영화를 연결할 지점은 무수히 많지 않은가. 자동차 광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목록은 어떨까? (자동차의 역사를 훑어본다거나, 최고급 차량으로 눈호강을 하고 싶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최고가의 차들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영화목록 감상도 좋으리라)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는 어김없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선택한 추천영화 목록'이 화면에 띄워지겠지. 이런 대중적인 추천목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영화매니아의 추천목록을 따로 불러와서 영화를 고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제 우주정복(바이런 허스킨,1953)을 보았는데, 만약 스트리밍 서비스의 형태로 영화감상이 이루어진다면 영화를 하나의 개체로 보지 않고 그 전후에 어떤 영화를 배치하여 감상하도록 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맥락이 형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주정복'을 함께 산 '우주전쟁'과 연속하여 볼 것인가, 혹은 잠수함 영화와 비교할 것인가. ('우주 정복'의 내부는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밀폐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잠수함과 유사하다)

IPTV는 상호작용하는 매체의 특성을 갖고 있다. 만약 영화를 이러한 방식으로 보게 된다면, 전송해주는 영상을 단순히 수신하지 않고, 반대로 커뮤니케이션을 보낼 수도 있다. 특정 장면에 커맨트를 직접 입력하여 이를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며, 심지어는 '아프리카 중계방'처럼 영화를 보며 각자의 집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으리라. 영상에 바로 표시를 하고 메모를 해두는 것도 좋다. 그렇다면 영화비평가는 괜찮은 커맨터리를 영화에 삽입하는 역할을 맡게 되지 않을까? '이 장면에서 벽난로 위에 놓인 두 개의 초는 장례식을 암시하는 것이다'라든가, '거실에 걸려 있는 그림은 18세기 네델란드 화가의 작품으로 바니타스 정물이며 영화의 상징적인 주제의식과 맞닿아있다'.. 이런 식으로 특정 평론가의 커멘터리버전을 따로 골라보는 매니아들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로 말 재주가 좋은 일반인이 영화를 비꼴 목적으로 비아냥대는 커멘터리판이 인기를 끌 수도 있겠지.

아마도 이런 서비스가 본격화된다면 히치콕의 영화는 감독이 단역으로 출연한 장면에 어김없이 커맨트가 달릴 게 분명하다. 물론 커멘트를 off로 처리해놓는 것을 깜박한 관람자는 영화몰입에 방해가 된다며 자신의 건망증에 한숨짓겠지.

'비선형적 사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권으로 읽을 수 없는 브리태니커  (8) 2009.03.14
수면의 시간  (0) 2009.02.27
김수현 드라마의 한계성  (3) 2007.06.09
형사 가제트의 비애  (0) 2007.05.21
조조할인 영화관람  (0) 2007.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