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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한 권으로 읽을 수 없는 브리태니커

by 늙은소 2009. 3. 14.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A. J. 제이콥스 (김영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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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에 발굴한(?) 서점을 다시 찾았다. 범계역에 위치한 '평촌범계문고'로, '2001아울렛' 맞은 편 '엠클래스'빌딩 지하에 위치해 있다. 지하 1층 전체를 서점이 사용하고 있는 듯 제법 규모가 있는데, 그러면서도 동네서점의 분위기가 풍겨 정이 가는 장소다.
서점 내부는 천정이 낮은 편으로, 조명의 수가 적어 어두우며 적갈색톤 바닥재와 붉은 기가 강한 체리목 책장을 사용해 어수선한 느낌이 든다. 평일은 밤 11시까지, 주말과 휴일에는 밤 10시까지 이용이 가능하다. 인근의 중고교생들이 자율학습과 학원을 다니느라 늦은 시간에 서점을 찾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브랜드가 없는 지역서점인 만큼 인테리어나 내부 구조, 책 분류 등에 있어 어설픈 요소들이 제법 눈에 들어온다. 하다못해 조명과 가구만 바꾸어도 산뜻한 휴식공간의 이미지를 낼 수 있을 텐데.. 서점은 책을 구입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사람을 기다리는 약속장소로 기억되는 게 중요하다. 책에 대한 충동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방법에 대해 이 서점은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첫날(목)은 몸이 피곤한 상태여서 대충 둘러보았고, 어제(금)는 한시간 가량 서점 내부를 돌아다녀보았다.
책 분류는 확실이 세련되지 못하여 교보나 영풍이었다면 결코 여기에 두지 않았을 책이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거나 인접하지 않은 분야가 나란히 놓여있기도 하고, 같은 책이 여러 장소에 배치되어 있기도 하다. 좋은 점은 앉아서 책을 마음대로 꺼내볼 수 있도록 작은 의자를 곳곳에 배치해두었다는 것과 직원의 수가 적고 이용객 또한 적어 조용히 방해받지 않으며 책을 오랫동안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제는 서점에서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A.J.제이콥스,김영사)'라는 제목의 책을 읽어보았다. 최근 10년 사이 잡학지식 책이 상당히 인기를 얻으며 여러 책이 등장하였는데, 이 책 역시 그 흐름에 맞춰 나온 듯 그럴싸한 제목과 광고 문구를 표지에 담고 있다. 제목만 보면 브리태니커 사전을 한 권으로 압축해 담은 것 같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이와 무관하다.
저자인 A.J. 제이콥슨은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의 중산층 유태인으로, 어느 날 자신이 젊은 시절의 지적 욕구를 잃어버린 채 점점 무식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브리태니커 사전 읽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사전의 A부터 Z까지, 단어 하나 빠트리지 않고 찬찬히 읽어나가는 이 프로젝트 기간 중, 그는 일기를 쓰듯 메모를 곁들인다. 사전을 읽다보니 이런 단어가 나오더라는 자신만의 감탄사를 비롯해, 해당 단어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상생활이 몇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기도 하다. 이게 어찌 '한 권으로 브리태니커를 읽는 책'이라 부를 것인가. 제목만 보고 책을 산 사람들이 2만 5천원이라는 가격을 아까워 할 법 하다는 생각이 든다. 663페이지에 달하는 만만치 않은 두께이다보니 저렴한 가격이 나오긴 힘들겠으나, 적어도 내지를 2도 인쇄(검은색과 별색 포함)하지 않았다면.. 양장본이 아니었다면 합리적인 가격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더불어 지식사전인양 과대포장한 홍보방법 역시 문제가 있다. 만오천원 정도의, 브리태니커와 에세이를 연결한 책 정도면 무난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을 꺼내들게 된 건 제목보다는, 역자인 '표정훈'씨 때문이다. 한 번 만난 일도 있는 표정훈씨는 국내에 몇 없는 출판평론가다. 그래선지 그가 참여한 책 중에는 '책(들)에 대한 책'이 많다. '젠틀 매드니스'는 애서광과 책 수집가의 컬렉션에 대한 책이었으며, '탐서주의자의 책'은 애서광인 자신의 책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문제는 브리태니커라는 사전으로서의 책 보다는 그 안의 지식을 파고드는 저자의 일상에 중심이 가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표정훈씨는 저자인 A.J.제이콥스 어떠한 동질감을 느꼈기에 이 책을 번역하기로 한 게 아닐까. 실제로 표정훈씨는 애서가이자 책 수집가이기도한 아버지에게서 책으로 가득 찬 집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고 한다. 책을 둘 곳이 없게 되자 서울 외곽의 싼 아파트를 구입해서 방과 거실 부엌 할 것 없이 모든 공간을 책장으로 채운 뒤, 마치 도서관처럼 그 안을 구역화하고 책을 채운 뒤, 이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고하니.. 그가 출판평론가가 된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A.J. 제이콥슨 역시 비슷한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법학자가 되기 전 다양한 분야를 두루 공부하였으며, 젊은 시절 브리태니커 읽기를 시도하였다가 결국 생업에 밀려 이를 포기하였다고 한다. 그가 브리태니커를 읽기로 한 것은 아버지가 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그 때문에 이 책은 지식에 대한 갈망과 함께 아버지와 아들, 다시 그 아들의 2세로 이어지는 한 가족의 역사가 함께 기록된다. 브리태니커를 읽는 동안 제이콥슨의 아내는 어렵게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한다. 제이콥슨은 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일을 이어받아 브리태니커를 읽고,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아버지가 된다.

그런 책이다.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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