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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남성 신경증을 앓는 여자들

by 늙은소 2009. 5. 17.


'3M흥업'에 올릴 글 때문에 라캉을 찾아읽기 시작했다. 
보다 상세한 경로는 이렇다. 미셀 투르니에의 '흡혈귀의 비상'을 읽다가 여성신경증-히스테리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고, '라캉과 정신의학'이라는 브루스 핑크의 책을 구매하게 된 것. 그러니 라캉을 읽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라캉학파의 일원으로 문화 이론에 천착하기보다는 임상분석에 이를 적용하고자 했던 브루스 핑크의 책을 읽은 것이니.

책은 비교적 쉬운 편이며, 실제의 사례가 제시되어 있어 이해를 돕는다. 그 결과 애초에 책을 읽게 된 동기 - 중년 여성의 히스테리에 대한 다양한 원인 분석 - 로부터 벗어나 여성 히스테리를 남성 강박증과 교차시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특히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여주인공인 '한명인(최명길)'의 불가해한 행동과 집착을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했다.

남성 신경증을 앓는 여자들

- [미워도 다시 한 번]의 한명인(최명길)은 과연 김유석(선우재덕)을 사랑한 것일까?


이 드라마의 특이성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딸의 징후가 읽힌다는데 있다. 한명인은 명진그룹 한회장이 누구보다 사랑한 막내딸이었다. (어머니의 이미지가 제거된) 부녀관계에서 한명인은 아버지를 이상적 존재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그 이미지에 투사함으로써 탈여성화를 욕망한다. 전 생애에 걸쳐 한명인은 <아버지의 아들-계승자>라는 이상을 자신과 아들 민수(정겨운)에게 강요한다.

한명인의 트라우마는 ‘남자들의 세계’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자신을 ‘누군가의 아내’로 만들려 한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 그녀는 자신이 마땅히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영역에서 추방당함으로써 아버지와 분리를 경험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체를 보완하는 강박증자의 태도를 취한다. 보통의 경우 히스테리는 상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내부의 불만족을 해결하지 않고 지속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강박증자는 상대를 소유(종속)함으로써 자신을 보완하며, 불가능한 대상을 욕망함으로써 좌절과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한명인은 김유석이 가난하고 힘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사랑했으며, 그가 죽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절대적인 것으로 포장한다. 김유석이 죽은 사람이었을 때 그는 이상화가 가능했으며, 한명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종속물일 수 있었다. 그러나 김유석은 살아있으며, 한명인의 현재에 개입하려 한다. 결국 드라마는 김유석을 다시 한 번 제거함으로써 한명인의 잠재된 소망을 지속시킨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여러 면에서 김수현의 작품을 연상하게 한다. 김수현은 [내 남자의 여자]와 [사랑과 야망]을 비롯, 여러 드라마에서 남성 자아상에 지배받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내 남자의 여자]의 이화영(김희애)과 [사랑과 야망]의 김미자(한고은)는 한명인처럼 내면에 남성 자아상이 자리해 있다. 이들은 부모에게 자신이 ‘아들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한다. 이화영은 어머니에 대한 강한 저항감과 동질감으로, 김미자는 죽은 오빠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죄책감으로 내적 분열을 겪는다. 김미자에게 있어 박태준(조민기)은 죽은 오빠의 대역이자, 자신의 부모가 소망한 아들의 현시와 같다. 김미자는 박태준과 끊임없이 경쟁하고 그와 자신을 비교하려 든다. 만약 김미자와 이화영이 매력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남성적 자아와 여성적 자아를 통합하고, 부모의 억압으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자신을 탐하는 남성들의 시선과 이를 활용하라고 부추기는 주변의 요구에 굴복함으로써 이들은 부모로부터 이입된 자아상에 고착되고 만다.
 - 3M흥업에 올린 글의 일부

이 드라마에서 '한명인'은 아버지의 몸통에서 떨어져나온 '아테네'와 같다. 그녀에게 어머니의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아버지만이 그녀를 지배할 수 있다. 한명인은 아버지에게 딸이 아닌 아들로 인정받기를 소망한다. 물론 여기서 아들과 딸의 정의는 그녀로부터 나오지 않으며, 아버지가 정한 규칙에 내재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소망은 어린 나이에 좌절을 경험하며 불가능한 소망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한명인의 경우, 재벌가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이러한 좌절로부터 그녀를 보호함으로써, 그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소망을 더욱 강화시키게 된다.

그녀는 약자인 김유석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이 남성들보다 우월하며, 남편에 의해 정의될 필요가 없는 존재임을 입증하려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녀를 배신하며 '넌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들의 세계에서 추방한다'고 선포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김수현의 드라마를 되돌아보니 남성적 권력과 태도, 욕망을 지닌 여주인공들이 김수현의 드라마에 얼마나 많이 등장하였는가가 새삼 놀라울 정도였다. 다만 한명인이 재벌가에서 태어났으며 성적 매력이 뛰어나지 않은 중성적 매력의 소유자라면, 김수현의 페르소나들은 신분상승의 욕구와 매혹적인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남성적 지배욕을 지니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 때문에 이 여성들은 자신의 성적 매력을 수단으로 삼아 남성들을 유혹하면서도 상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려는 히스테리와 달리,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으로 '존재의 근원'을 찾아 괴로워한다. 여러 면에서 그녀들은 강박증에 더 가까운, 신경증을 앓고 있다.

불가능한 대상을 욕망함으로써 죄의식에 사로잡히며, 그 죄의식에 자신을 구속하기 바란다는 점에서..
권위적인 인물(특히 남성)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며 이러한 상대에 집착하는 태도들..

[내 남자의 여자]에서 이화영은 친구의 남편을 유혹함으로써 죄의식을 갈구하고, [엄마가 뿔났다]에서 맏딸 영수는 딸이 있는 이혼남과 결혼함으로써 그 딸에 대한 죄의식과 결합한다.

지금 우리는 과거와 같은 철저한 남성중심 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며, 남아선호사상이 예전처럼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들은 자신을 위 아래로 훑어 내리는 남성의 시선속에서 '여성의 몸'에 갇히는 경험을 반복한다. 부모와 사회가 정의한 '남성'과 '여성'의 영역은 여전히 존재하며, 몇 사람의 여성은 그들이 정의한 '남성'의 영역속에서 자아가 뿌리내리기를 소망한다.

정신의 평화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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