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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과거를 거닐다

by 늙은소 2009. 5. 19.

1980년 5월 19일,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여전히 바쁜 흉내를 낸다. 오후 6시가 되면 각 방송사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과 함께 그날의 방송을 시작한다. MBC에서는 ‘오로라 공주와 손오공’을, TBC에서는 ‘요술공주 새리’를 방영하였다. 당시 남자아이들은 손오공마저 꼼짝 못하게 만들 정도로 뇌세적인(?) 오로라 공주에게 빠져들었으며, 여자아이들은 처연한(만화 주제가 치곤 상당히 슬픈 멜로디가 아닌가!) 새리 주제가에 맞춰 고무줄을 뛰었다. 월요일 6시가 ‘오로라 공주’와 ‘새리’의 각축전이었다면, 화요일은 MBC의 ‘날으는 전함 V호’가 모든 어린이를 사로잡았다. 수요일은 물론 TBC에서 방영한 ‘독수리 5형제’의 완벽한 승리였다. 5월 대한극장에서는 ‘록키2’가 개봉하였고, 영등포의 연흥극장과 종로 2가의 우미관, 청량리의 오스카극장에서는 ‘사형도수’를 볼 수 있었다. 큰 인기를 끌었던 한국영화 ‘순악질여사’는 개봉관을 떠나 영등포의 영보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문의 방송편성표 바로 옆자리는 대학 휴교령에 따라 대학 농구 결승전이 열리지 않게 되었다는 짧은 기사들이 채우고 있었다.

이미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선포가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포고문의 세부 사항에는 옥내외 집회를 모두 금하나 관혼상제와 순수종교행사는 예외로 하며, 이러한 경우에도 정치적 발언을 불허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검열과 전문대를 포함한 각 대학은 휴교조치하며 정당한 이유 없이 직장을 이탈하거나 태업 및 파업행위를 금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이 외에도 전 현직 국가원수를 모독비방하거나, 북괴와 동일한 주장을 펼치거나 용어를 사용하는 행위, 선동적 발언 및 질서를 문란 시키는 행위에 대해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는 내용 또한 포고문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네이버가 지난 달 오픈한 디지털뉴스아카이브 서비스에서 살펴 본, 1980년 5월 19일 신문기사로부터 나온 정보를 재구성한 것이다. 현재 베타서비스로 경향, 동아, 매일경제의 1976년~1985년 사이의 기사만 열람이 가능하다. 

80년 5월 18일. 신문은 계엄령의 확대와 광주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며, 한편으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적인 소식을 전달하기도 한다. 연극공연과 출판소식, 용모 단정한 여사원을 뽑은 기업들의 구인란, 6시에 내가 좋아하는 만화가 어김없이 방영되는지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아이들. 29년 전의 신문은 역사의 순간과  함께 일상적인 삶이 계속되었음을 이야기한다.



...

글을 쓰다보면 과거의 기억이 세밀하지 못하고, 세부 정보가 부족해 애를 먹을 때가 있다. 1990년대 중반 신촌 여우사이에서 판매한 레몬소주의 술값과 판매 단위는 어떠했는지, 모임에 참석하기 전 챙겨 먹었던 겔포스는 얼마였는지 지금으로선 도통 알 수가 없다. 물론 겔포스를 판매한 보령제약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보령역사관’이 있어, 이 회사가 1957년 보령약품(약국명)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 용각산과의 기술제휴로 용각산을 생산 판매하였고, 용각산 판매 수익을 기반으로 제약회사로 발돋음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겔포스’가 70년대에 이미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 겔포스가 내 나이와 비슷하다니! - 그러나 연도별 겔포스 가격변화 그래프 같은 정보가 제공되지 않으니, 회사 홍보팀에 전화를 건다고 바로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가끔은 구글 어스 같은 서비스에 ‘역사’개념을 적용시켜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 최근 구글 어스는 업데이트를 통해 제한적으로나마 역사개념을 적용하여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서비스하고 있다. - 인공위성 사진으로 전 세계를 탐색할 수 있도록 한 구글 어스는 세계여행을 하는 것 같은 만족감을 주곤 하는데, 만약 여기에 ‘연도’를 첨가하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를 검색어에 입력하면, 1980년 5월의 금남로가 어떠했는지 인공위성사진으로 내려다볼 수 있지 않겠나. 물론 이것은 과거의 위성 사진이 현재 데이터로 축적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만약 데이터가 없어 과거로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지금부터라도 이를 기록해두어 몇 년 뒤 활용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보자. 10년 뒤 당신은 2009년 5월을 회상하며 동방신기 숙소 앞에서 사생 뛰던 삶을 떠올리고는, 그 시기의 위성 사진과 다음의 로드뷰 데이터를 불러와 기억을 더욱 세밀하게 직조하게 될 것이다. SM 사옥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추억과 함께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먹었던 롯데리아 런치세트의 가격이 얼마였는지 궁금할 수도 있으니 여기에 제품가격정보를 결합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구글어스+다음로드뷰+네이버뉴스아카이브+각기업의 제품가격정보...] = ? 


물론 이 외에도 추가하면 좋을 정보는 무궁무진하다. 이런 데이터를 한 자리에 모아 ‘타임머신’ 서비스를 기획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타임머신'의 초기 모델이 어쩌면 이와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특정 시대로 육체가 이동하지는 못할지라도 과거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결합하는 것만으로도 역사는 생명력을 갖는다. 이것은 그 역사를 살아간 개인들의 삶을 보다 조밀한 기억으로 채우며, 정보는 그러한 개인의 기억과 결합함으로써 다양한 외면을 갖추게 된다. 당신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음악 파일은 그 자체로는 자신만의 Identity를 지니지 못한다.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옮겨 다니며 파일은 고유의 역사를 경험하지만, 디지털화된 정보는 복제, 이동과정에서 변이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밑줄이 그어진 책은 누구에게도 팔리지 않아 깨끗한 새 책과 전혀 다른 존재다. 파란 볼펜으로 줄을 그어가며 본 사람 뒤에 자를 대고 반듯하게 샤프펜슬로 선을 그은 사람이 다시 그 책을 읽음으로써 책은 고유의 역사를 기록한다.

저작권 문제와 기술의 발전, 개인의 편리성이 결합하며 매일같이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하고 있다. 핸드폰으로 다운받아 음악을 듣거나,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가 등장하기도 하며, 책을 오디오파일로 듣는 방식도 등장하였다. 그러나 가끔은 컨텐츠를 담는 매체가 무엇이며 어떻게 소비하는가라는 질문 보다, 그 경험이 어떻게 고유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줬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선물했기에 특별한 음악은 더 이상 복제 가능한 디지털 데이터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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