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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지구 멸망 보험

by 늙은소 2009. 3. 18.

영화 [나는 전설이다]가 개봉했으나 이를 보지 않았다. 어린 시절 보았던 [오메가맨]의 충격을 윌 스미스판으로 덮어쓰기 싫은 이유가 가장 크다. 혹자의 말을 빌리자면 "백인취급 받는 윌 스미스의 '좀비에게도 구원을!'" 에 해당하는 영화라 한다. 영화를 보는 대신 우리는(함께 일하는 후배와 나) 지구 멸망 후에 홀로 남아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각자의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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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던 때 주말의 명화로 보았던 [오메가 맨]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묘한 매력을 풍기는 작품이었다. 주인공은 텅 빈 뉴욕 시내를 홀로 돌아다니며 통조림 같은 장기 보존 식품을 수집하였다.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과 최신 유행이었을 의상 따위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자가 발전으로 움직이는 몇 개의 가전제품과 전기 시설은 깊은 밤에도 빛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나는 그가 부러웠다. 자신의 삶을 비참한 것으로 뒤바꿔버리는 비교대상이 사라진 세상. 신경써야할 사람도.. 열등감을 느끼거나 시기하거나 혹은 나를 비난할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세상의 풍경은 고독할지언정 선망하게 되는 어떤 것이었다. 좀비들이 끊임없이 그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그 때 나는 생각하였다. 

소설이 다시 영화화되자 세상의 종말에 대한 상상에 빠져든다. 인류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과 그들이 모두 시체로 남겨지는 것은 또 다른 종말의 풍경을 만들 것이다. 썩어서 악취를 풍기는 시체들과 함께 남겨진다면 혼자 남은 삶이 몇 년 간은 꽤 고역스럽지 않겠는가. 

만약 혼자 살아남는다면 제일 먼저 해야할 건 무엇일까? 전기와 난방, 취사를 위한 도시가스와 식수, 하수 등의 문제는 인류가 사라진 후 얼마 동안 지속될 수 있을까? 통조림 등 장기 보존 가능한 식품의 종류와 각각의 보존기간은 얼마나 될 지도 궁금하다. 과수원과 논과 밭은 사람의 손길 없이 얼마 동안 유지되며, 새로운 과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역시 직접 농사를 지어 가공식품에 의존하지 않도록 식량확보 시스템을 갖춰야 할 것 같다. 더불어 식량을 구하기 어렵고 난방이 필요한 겨울철에 대한 대비와, 음식이 빠르게 썩는 여름에 대한 대비도.

결국 내가 해야할 일들은 혼자 남겨졌을 때 어떤 생활 환경을 구성하고 싶은지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다. 생을 유지하기 위한 생필품을 확보하는 데만 해도 적지 않은 이동거리를 요구하니, 운전은 필수사항이다. 세상에 혼자 남았다면 다른 차를 걱정할 필요는 없으나, 차량의 유지와 휘발유 공급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 차량을 수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 다른 차량으로 바꿔 사용해야 하므로, 예비 차량을 수십 대 미리 확보하여 주기적으로 관리하고 보관할 장소를 마련해놓는 것도 필요하다. 여러가지를 모두 해결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역시 지구 멸망 초기에, 도서관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찾아놓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역시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물품은 건전지가 아닐까. 마트든 도서관이든.. 1단계에서 필요한 식품과 식수를 확보해두려면 창고와 마트를 뒤져야 할 테니, 손전등과 건전지를 다량 확보해두는 것이 최우선과제가 되리라. 

2단계에에 이르면 자가 발전 시스템을 갖춘 대형 냉장, 냉동고를 찾아야 한다. 주거지 역시 바꿔야 하는데, 태양열 시스템을 갖춘 주택으로 교통이 편하며 휘발유 공급과 넓은 창고 시설, 냉동창고, 대형마트, 도서관이 인접하면 좋을 듯 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적어도 10년은 지루하지 않게 매우 바쁜 일상을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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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시 생각을 조금 비틀어보았다. 만약 전 지구가 아니라, 한 반도에서만 인류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 국가, 혹은 대륙 하나에서만 인류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다른 나라에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다른 국가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바로 침입하여 '여기는 우리땅' 이라며 깃발을 꽂을 수 있을까? 역시 그런 행위를 섣불리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리 하다가는 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십상이지 않겠는가. 다들 사태파악하느라 분주히 움직이며 눈치를 볼 것이 분명하다. 그러는 사이 해외에 퍼져있는 교포과 마침 외국에 나가있던 국민들이 부랴부랴 들어와 돈 될 만한 재화를 차지하겠다고 난리를 칠 것이 분명하다. 만약 이러한 일이 발생하였는데 자신이 해외에 있는 상황이라면, 비행기보다는 배를 한 척 빌려서 국내에 들어올 것을 권유한다. 다이아몬드나 금 따위를 가지고 나가려면 화물을 실을 수 있는 배가 필요하다. 물론 비행기를 타고 재빨리 도착해 중요한 물건을 챙긴 다음 항구로 나가 아무 배나 집어탈 수도 있으나, 비행기에서의 안전을 어찌 보장하겠는가. 느려도 안전을 중시하는 태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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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경우도 있다. 세계적으로 고른 분포를 보이며 인류가 사라져 10만명, 혹은 1만명 정도 남는다면?..
인구가 적은 사막이나 고산지대에서는 몇 달 넘게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생각하며 지구가 완벽히 멸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거대한 대도시에서는 백 여 명 정도가 모여 앞으로 살아갈 일을 걱정하기 시작하겠지. 그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런 상상을 하는데 후배가 끼어든다. 이 아이로 말하자면 지구가 멸망해 혼자(혹은 소수가) 남겨졌을 때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물론이며, 타인의 부러움을 살 인간에 해당한다. 힘 쓰는 일을 잘하는데다, 전기 시설과 각종 기계를 다루고 만드는 데에도 능하니 상당한 수준의 문화생활을 누리며 살 것이 분명하다. 나는 기껏해야 차를 끌고 다니며 마트를 수색하고 있을 그 시간에 이 아이는 배를 타고 나가 물고기를 잡은 후 회를 해먹겠다 하니.. 자연 억울한 마음이 든다. 하여 비굴하나마 전 지구에 만명 정도 남게 되었을 때 분명 너는 리더급에 오를 것이 분명하니 그 때가 되면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미리 해두었다. (지구멸망보험차원에서 ^^) 후배 왈. 누나는 정보를 찾아 정리해두는 능력이 좋으니, 지구가 멸망하면 도서관에 보내 필요한 자료를 찾아 정리하는 역할을 맡기겠단다. 이거 참..- -; 기뻐해야 하나?  

 - 2007. 12. 28 -

2007년 글에 덧붙임.
'지구 멸망 후의 삶'이라는 주제는, 후배와 즐겨 떠드는 잡설 중 인기가 높은 편이다. 만약 지구가 멸망했는데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이런 걸 해보자며 매번 엉뚱한 상상을 한다. 그런데 요즘 경제가 불안하다고 연일 떠들어대니 우리가 기대한(?) 지구 멸망과는 정 반대의 풍경이 펼쳐질 것만 같아 여간 두려운 게 아니다. 우리가 낭만적으로 떠들었던 지구 멸망은 모든 물적 재화와 자원은 그대로인데 사람만 사라진 것이다. (심지어 시체조차 남지 않고)
그 때가 되면 넘치는 물건을 어찌 관리할 것인가와, 중단된 시스템을 소규모로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경제공황은 이와 반대여서, 사람은 그대로이고 물건도 그대로인데 이것을 살 수 없어 굶어죽는 상황이 아닌가. 한쪽에서는 창고의 식품이 썩는데 이를 팔지 못하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이를 사지 못해 굶는.. 이건 너무 정 반대의 최악이 아니냐며 우린 또 다시 '지구 멸망 후의 삶'을 이야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