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텐 : 배역이 필요할 때가 있다

텐텐 감독 미키 사토시 (2007 / 일본) 출연 오다기리 죠, 미우라 토모카즈, 코이즈미 쿄코, 요시타카 유리코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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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만 엔의 빚을 갚지 못해 장기라도 팔아야 할 상황에 처한 후미야(오다기리 죠)는, 생의 한 발을 바깥으로 내밀지 못해 멈춰 서 버린 대학 8학년생이다. 부모가 살아있다면 니트족이 되었을 것이나 부모는 그가 초등학생일 때 이혼하였고, 어느 누구도 그를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후미야의 삶은 히키코모리와 유사하다. 그의 주변에는 친구도 가족도, 정신적으로 의지할 선배나 어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너저분한 방 안에서 사회로 나서지 못한 채 대학생 신분을 유지해온 것은 새로운 배역을 제안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느 날 빚을 받으러 온 후쿠하라(미우라 토모카즈)가 빚을 탕감해주는 대가로 도쿄 산책을 제안하며 후미야의 삶에 작은 변화가 시작된다. 아내를 죽인 직후인 후쿠하라는 자수하기 전까지 도쿄의 좁은 골목들을 둘러보기를 원하였고, 후미야에게 동행을 요구한다. 후미야는 후쿠하라를 따라 도쿄의 오래된 골목과 작은 상점들을 지나치며 그 속에서 삶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한다. 후쿠하라가 그의 아내와 즐겨 걸었던 산책로와 단골집을 비롯해 후미야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터까지. 후쿠하라와의 산책을 통해 후미야는 수직과 수평을 가로지르는 기억을 얻는다. 부모가 헤어지기 전 평범한 아이였을 때의 사소한 기억들을 떠올리고, 마음을 설레게 한 동네 여자아이를 찾아가 만나보기도 한다. 한 번도 가본 일 없는 장소를 후쿠하라와 거닐며 후미야는 다양한 추억을 그 길에 새기게 된다. 허름한 시계방 주인에게 얻어맞고 나뒹군 골목과, 처음으로 가 본 동물원에 대한 기억 등을.

 

[텐텐]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에게 맞는 배역을 필요로 한다. 후미야는 길에서 만난 특이한 기타리스트를 밤이 될 때까지 따라다니며 그를 흉내내기도 하고, 후쿠하라의 아들 행세를 하며 카페 여주인과 가족극을 펼치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역할극을 통해 미처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서에 잠시나마 다가가고, 자신이 그것을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후쿠하라 역시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을 대신해 후미야와 부자 관계를 수행하며 사회에서의 마지막 삶을 정리한다. 또한 후미야의 초등학교 시절 짝사랑 상대는 코스프레족과 어울리며 가상의 캐릭터로 자신을 치장하며, 카페 여주인은 후쿠하라와 예식장에서 부부로 연기하였던 상대였다. 이들은 모두 자신에게 맞는 옷이 없어 그대로 멈춰있거나, 비현실적인 외피로 가장한 채 현실을 외면해왔다.

 

후쿠하라가 자신의 아내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후쿠하라는 아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젊은 남성과 어울리며 공허한 현실을 부정하려 하였다. 함께 텅 빈 막차를 타고 돌아오던 중 그녀는 남편을 버스에 버려둔 채 홀로 내려버린다. 후쿠하라가 아내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이 아닌 다른 젊은 남성을 찾아갔기 때문이 아니라, 세월에 순응하지 않으려 한 그녀의 태도에 있다. 후쿠하라는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 세대와 세대가 소통하기를 바란다. 그 때문에 그는 자수하기 전 후미야에게 자신이 삶아온 삶을 들려주고 그가 과거를 딛고 새로운 삶을 살아나가도록 길잡이 역할을 수행한다.

일본 영화는 종종 '2%' 같은 이온음료의 맛이 느껴진다. 자극 강한 탄산이 없으며 향과 맛이 모두 싱겨워 늘 당황하게 되는 이 영화들은 제법 조용한 여운을 남기는 특징이 있다. [텐텐] 역시 마찬가지여서 후쿠하라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며, 이들이 구성한 유사가족이 눈물을 쥐어짤 만큼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주제를 분명히 드러내지도 않고, 신파성 또한 제거되어 있다. 가족애를 되돌아보게 한다든가, 사회진입을 주저하는 젊은이의 방황과 같은 상투적 주제로 영화를 한정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러한 주제 한정에 강박관념을 지닌 한국영화와 비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