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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주노 : 치유의 힘, 주노

by 늙은소 2009. 1. 27.
주노
감독 제이슨 라이트먼 (2007 / 미국)
출연 엘렌 페이지, 제니퍼 가너, 마이클 세라, 제이슨 베이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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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는 말했다. 네 영화 취향이 나와 잘 맞았던 것은 아니라고. 그 말에 조금 당황했다. 어려서부터 언니의 영향으로 팝송을 들었고 영화를 보았으며 책을 읽었다. 때문에 내 취향의 상당 부분이 언니의 영향을 받았고, 그녀가 결혼하기 전까지 우린 제법 죽이 잘 맞는 자매였다고 생각해왔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언니는 무엇보다도 내 코미디영화 취향이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자신은 ‘쏘우’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넌 그렇지 않다며, 반면 자신은 썩 좋아하지 않는 코미디 영화를 넌 재미있게 보더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 사실 난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 곤란한 인간' 취급을 받으면서도 한 없이 가볍고 기분 좋아지는 밝은 코미디를 선호해왔다.

 

해피엔딩이 분명한 영화를 고를 때의 내 마음은, 병원에서 의사의 처방을 기다리는 환자와 유사한 높은 치유에의 기대로 충만해 있다. 마음이 우울함으로 가득할 때, 슬픔이 살갗 아래 스며들 때... 절실한 것은 현실을 잊게 해 줄 웃음이다. 그 때문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소모성 코미디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생각 없는 웃음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었다.



이런 취향은 사람과의 사귐에도 영향을 주어, 나와 비슷한 분위기의 암울한 사람보다 한 없이 긍정적인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곤 한다. 세상의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난 사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게 하는 사람에게 이끌려, 그들 주변을 어슬렁거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남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들의 밝음은 나의 우울함을 가릴 수 있을 정로로 눈부셨지만, 그들의 몰이해가 나를 힘들게 했다. ‘너는 왜 삶을 힘들어하니’ 라며 삶이 힘들 수밖에 없는 무수히 많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함에 지친다. 밝기만 한 사람들과의 교우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가능한 일임을 단정하며, 그들 앞에서 나를 드러내 보이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를 주게 되었다. 함께 어울려 웃기만 할 상대로, 기분이 좋아질 필요가 있을 때 적절히 시간을 보낼 상대로.. 마치 내용 없는 코미디 영화를 대할 때처럼 그렇게 나는 사람들을 분류하고 적절히 이용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이다.


나이가 들고, 다양한 이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삶의 어려움을 이해하면서도 그런 삶조차 즐거운 대상으로 바꾸는 내적 능력이 있다. 저런 태도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구나, 힘들어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 여유를 배우고 싶었다. 물론 아직은 실패를 반복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들처럼 나도 이 지리멸렬한 삶을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려니.. 

 


[주노]는 바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닮은 영화이다. 마냥 밝은 코미디 영화여서 시간 보내기 좋기만 한 영화도 아니고, 진지하여 가슴이 답답해지는 영화도 아니지만 진지함과 웃음을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영특한 영화이다. 이런 분위기는 주인공인 주노(엘렌 페이지)를 비롯한 등장인물들 모두에게서 발산되는 내적 힘으로부터 비롯된다.

 

삶이 쉽기만 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영화는 진정한 의미의 치유력을 품고 있다.

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락의 계보를 외우고 다니며 영화에 대한 남다른 취향을 지닌 '주노'는 오랫동안 이웃에서 친구로 지낸 폴린 블리커(마이클 세라)와 성경험을 해보기로 한 뒤, 의도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 세번이나 확인한 끝에 중절수술을 받기로 결심하고 병원을 찾아간 그녀지만, 마지막 순간에 생각을 바꿔 아이를 낳아 입양을 보내기로 마음을 바꾼다. 이제 필요한 것은 가족의 동의. 고등학생인 딸의 임신에 충격을 받지만 가족들은 이 모든 힘든 결정을 함께하기로 하고,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어 그녀를 돕기로 한다.

 

주노는 아이를 입양할 가정을 찾아 벼룩시장을 뒤진 끝에 '바네사(제니퍼 가너)'와 '마크(제이슨 베이트먼)' 부부의 좋은 이미지에 반해 그들에게 아이를 보내기로 '104%' 결심한다. 특히 남편인 마크에게 좋은 이미지를 받은 주노는,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러 방문했다가는 마크와 만나 영화와 음악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마크 또한 아내인 바네사와 나누지 못하던 취향에의 공감을 주노와 나누며 자신의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은 갈등의 폭을 메우지 못한 채 이혼을 하기에 이른다.


주노는 임신을 통해 육체적 변화 뿐 아니라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이제껏 이상형으로 생각해오던 인물에 가까운 '마크'는 생각보다 어른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했다. 또한 어려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에 대한 기억 때문에 주노는 이상적인 어머니 상을 '바네사'에게 요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본인이 비록 완벽한 가정에서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주노는 분명 자신의 가족과 친구, 삶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 결론 끝에 주노는 이제는 깨져버린 '바네사'의 가정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결국 그녀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기기로 결정하게 된다.


[주노]는 독특한 성장영화다. 보통의 성장영화가 인물의 변화를 통해 한 단계 성숙한 인간형으로 바뀌는 것을 다룬다면 [주노]는 이미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긍정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좋은 치유제가 된다. 완벽해지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는 인간을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충분하다고 이야기하는 영화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