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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타인의 고통

by 늙은소 2005. 1. 19.

2004년 12월 28일, 수잔 손택이 사망했다. 내가 그녀의 사망소식을 접한 것은 2005년 1월 7일의 일이다. 그날 나는 먼지가 제법 쌓인 '해석에 반대한다'를 꺼내어, 읽지 않고 남겨 두었던 몇 개의 단문을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지금은 '타인의 고통'을 읽는 중이다. 추모기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글들에 계속 시선이 머무르는 것을 보니.


2003년 런던에서 열렸다는 '전쟁사진전' 중 몇 개의 작품을 며칠 전 우연히 보았다. '참혹함의 단면'에 뒤따르게 마련인 정서의 변화가 어김없이 나타난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불편함의 무게가 매우 빠른 속도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조금 다르다. 동유럽과 서아시아에서 벌어진 최근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그 사진들은.. 과거 1차 대전이나 2차 대전의 흑백 사진들과는 다른 새로운 감성의 출현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좀더 불편하게 했으며, '사건'이 아닌 '사진' 그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타인의 고통'을 읽으며, 새롭게 등장한 이 불편함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사진들이 지나치게 잘 찍힌 사진이라는 점에 있었다. 컬러와 구도, 인물의 표정과 같은 미적 평가 기준에 비춰보았을 때에도 매우 훌륭한 이 사진들은, 담고자 하는 이야기를 표현하는 능력과 순간을 포착하는 힘... 그 모든 것에서 우수한 편에 속한다. 바로 그 점이 불편하다. 전쟁, 혹은 참혹함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에게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객관성이 보장되어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사건의 내용과 결과를 목격하고 싶다는 열망 외에도, 사진을 통해 우리는 정의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헛된 기대를 품게 된다. 그것은 저널리즘에게 바라는 것과 동일한 기대이다.

본래 전쟁사진의 시작은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저널리즘이었으며, 이미지는 곧바로 전쟁의 당위성과 선동을 위해 교묘하게 사용되곤 했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사각 프레임 외곽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는 것을 금지당한 채 우리는 그것이 진실일 뿐 아니라, 정의를 제시한다고 믿게끔 교육되어 왔다. 참혹한 현장이 제공하는 충격과 연민은 그들이 희생자며, 그들의 반대편에 선 자들이 폭력을 행사한 것이고 정의를 배반한 '적'이라고 규정하도록 만든다.

포커스가 흔들린 사진에서 전장의 긴박함을 느끼고, 사진을 뒤덮은 희뿌연 먼지들은 화염과 잿더미로 변한 마을의 흔적을 간접적으로 설명해준다. 이제 이 모든 것은 '효과'가 되어버렸다. 핸드핼드 기법으로 촬영하여 긴박감을 부여하는 것이 모든 전쟁영화의 공식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포커스가 매우 잘맞는 현대의 전쟁 사진에서 오히려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선명한 컬러와 클로즈업 된 사진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아울러, 저널리즘의 허울조차 없이 미적인 대상으로 전쟁을 소재로삼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그것이 남기는 불편함이 또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미지의 적나라함은 늘 예상치 못한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생각하는 중이다. 많은 예술작품, 문화라 불리는 여러 영역들에게서 우리가 '윤리학'의 기준을 거둬들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좋음'이나 '기호', '심미'와 같은 용어들을 '옳음'과 동일한 축에 나란히 위치시키지 않는 것의 어려움. 그것은 분명 필요한 작업이기는 하나, 그만큼 위험하기도 한 작업이다. 답을 찾을 수는 없으나, 치열함과 부단한 회의가 없다면.. 그 위에 어떤 가치가 올라설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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