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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그러나 그녀는 없었다

by 늙은소 2005. 4. 2.

한 아름 꽃을 안고 머리칼이 젖은 너와 함께 돌아왔을 때

나는 말도 못 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빛의 핵심인 정적을 들여다보며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

T. S. Eliot - ‘황무지’ 중에서

전쟁은, 신이 그를 위해 마련한 제단과 교회를 파괴하는 것과도 같은 모순된 현실을 인간에게 제시한다.

무엇보다 확연한 ‘의심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하기 위해 모든 사물을 가치로 환원시킨 합리성은, 놀라운 창조적 능력과 함께 파괴의 힘을드러냈다. 이러한 충격적 경험은 파괴되지 않는 것, 영속적인 것에 대한 갈증을 더욱 심화시킨다.파괴되어버린 과거와 정신 속에서 사람들은 회복과 재건을 요구하지 않는 새로운가능성들에 눈 돌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의적 형태를 소유하지 않는 액체의 물리적 성격, 해체와 재조립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는 퍼즐이나 레고 블록, 혹은 거울이나 미로와 같은 사물의 구조와 특성들이 부각되었고, 이들은 현대예술에 수용되었다.

현대 예술이 난해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수용자에게 높은 지적 능력과 지식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는 것은 개별 작품이 기초로 한 도덕적 질서를 파악하지 못하는 까닭에 있다. 또는 어떠한 질서도 기초로 하지 않는, 수용자 스스로 질서를 세워야 하는 작품들 앞에서의 난감함이 백지와 같은 상태로 우리의 정신을 유도하는 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을 수행하기 위해 현대 예술은 의미과정을 철폐한다.


지금 언어는 지시할 수 없는 기호이며 현실을 명명하는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해체된 언어들은 침묵의 어둠 안에서 광휘를 꿈꾼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 드리워진 그림자 안에서 하나의 명랑함을 발견한다.


.....

‘비극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 이는 마치 생식(生殖)이라는 것이 부단한 싸움 속에서도 단지 주기적으로 화합하는 남녀 양성(兩性)에 의존되어 있는 것과 같다. ... 두 개의 상이한 충동은 대체로 공공연히 대립된 채 서로에게 보다 힘찬 재탄생을 유발시키며 공존해 간다. 그렇게 ‘예술’이라는 공통의 단어만이 외견상으로 연결시켜주고 있는 대립적 충동의 투쟁은 지속된다.

F. Nietzsche - ‘비극의 탄생’ 중에서


상이한 존재인 ‘그’와 ‘그녀’는 대립과 충동의 격함 대신 스며드는 관계를 채택한다.일상의 사람들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의 거리를 유지할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그들은 거리를 제거하기 위해 자기 자신마저 제거해버리는, 그리하여 새로운 하나의 존재가 될 것을 택한다.

최외각의 일부가 비어있는 두 원자는 서로의 가전자를 공유함으로써 최외각을 완전히 채워 안정을 찾는다. 이것이 공유결합이다. 이 결합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전자를 방출하고 다른 쪽이전자를 받아들여 결합하는 이온결합과 달리 서로의 전자를 공유하는 결합이며 높은 결합 에너지를 지닌다. 이렇게 생성된 새로운 물질은 자신을 구성하는 이전의 원자들과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는 그녀와 공유결합 함으로써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그가 된다. 그녀가 육체적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는 정신적 소멸을 겪는다.

‘정신을 좇지만 정신이 되려 하지 않는 자연’

그녀가 그의 내부로 스며들 듯 흡수되어 과거의 그와 결합해 새로운 존재를 잉태한다.하나의 죽음을 통해 태어난 그는 지금까지볼 수 없었던 것, 들을 수 없었던 것을 회복한다.

빛과 소리가 찾아온 곳에, 그러나 그녀는 없었다.

2004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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