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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심야의 성인영화

by 늙은소 2005. 7. 4.

밤 12시를 알리는 종과 함께 신데렐라의 마법은 사라진다. 아름다운 드레스가 누추한 옷으로 뒤바뀔 그 시각,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는'19'를 붙인 채 성인영화를 방영하기 시작한다. 리모콘을 이리저리 누르며 채널을 탐색하다 가끔은 이런 영화도 봐줄 필요가 있다며 제법 진지한 자세로 시청을 해보는데, 독특한 그들만의 '영화문법'이 발견되어 흥미롭기까지 하다. 

심야 성인영화에도 몇 가지 패턴이 있다. 그 중 특징적인 두 가지를 비교해보자. 우선 '갑부' 캐릭터를 중심으로 음모와 살인이 뒤엉키는 스토리가 있다.

이런 영화에는 여주인공을 도와 함께 범죄를 저지르거나, 혹은 위기에 처한 여주인공을 도와 살인범을 잡는 탐정이 등장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끌린 남녀가 관계를 갖고 결국 영화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 여기에도 중요한 절대원칙이 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 해도 성관계는 반드시 성공하며, 관계 도중 그들을 방해하는 사람이 절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신 로보트 만화에서, 변신 도중에는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약속과 비슷하다.

또 한가지 패턴으로는 '황당한 정식분석형' 스토리가 있다. 여기에는 인간 내부의 본능을 이끌어냄으로써 성적인 억압으로부터 탈출하겠다는 그들 나름의 설득이 늘 뒤따른다. 최면술과 각종 실험, 연구를 위해 남녀의 성행위를 실험의 수단응로 삼는다는 이야기가 주된 소재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인류'를 연구하러 온 외계인이 인간의 성적욕망을 체험하는 식의 황당 sf 스토리가 펼쳐지기도 한다.

첫 번째의 경우가 허술하지만 스토리를 필요로 하는 것과 달리, 두 번째의 경우는 이렇다할 스토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연구대상 교체하며 성행위를 반복할 뿐이다. A의 성적욕망을 확인한 뒤 B를 불러와서 연구하고, 다시 C를 불러오는 꼴이다. 이러한 스토리는 인물간의 관계나 이야기의 개연성을 무시하고 끊임없이 sex 장면을 삽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야말로 '본능에 충실한'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

이에 비해 첫 번째 패턴의 성인영화는 불리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일단 '갑부'가 등장하다보니 소품과 의상 등 제작비 지출이 크고, 구성상의 어려움도 뒤따른다. 그리하여 성인영화의 꽃이랄 수 있는(- -;) sex scene을 어떻게 하면 더 자주 넣을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일단 갑부는독특한 성적취향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여자를 묶거나 이상한 역할을 부여하거나, 뜬금없는 무반주 스트립쇼를 해보라는 등의 황당한 요구를 한다.(그래서 결국은 죽는다) 복수를 결심한 여자는 킬러를 물색하는데, 한 사람의 킬러로는 만족할 수 없는지 꼭 여러 명의 남성을 음모에 가담시킴으로써 사태를 복잡하게 만든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이 남자들은 여자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관계를 가진다.그런데..이 남자들은 신기하게도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여자의 마음을 확인했노라 확신하는 것이다. (남자들이 이렇게 단순하다면 세상이 얼마나 살기 편할까)
...
케이블을 보기 전에는 이런 영화들을 볼 기회가 없었기에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막상 몇 편을 보니.. 남자보다는 오히려 여자들이 입체적인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자가주인공인 영화가 거의 대부분이라 조금은 놀랍다고나 할까?

영화는 분명 남성 시청자를 대상으로 제작된 게 분명하다. 성적인 장면에서 이목적은 더욱 분명해진다. 영화에는 온통, 시작하자마자 바로 신음소리내는 여자들로 들끓고 있지 않은가. 영화의 모든 sex scene은 남성적 시선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주인공이 여자이다. 왜일까?

성인용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는 게임 주체의 몰입을 위해 주인공을 남자로 설정한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여러 여자들을 유혹하며 다니도록 게임스토리가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CG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의 이미지는 거의 대부분 손이나 신체 일부, 혹은 뒷모습이 나올 뿐이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있다보니 남자주인공은 '얼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것이 몰입을 더욱 강화하는 요인이 된다. 구체적인 얼굴과 특이한 목소리를 지닌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는 어려우니 가급적 주인공은 얼굴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영화에서 남성 시청자가 몰입하는 대상이 누구여야 하는가. 이 영화들은 시청자로 하여금 영화 속의 모든 남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드는 전략을 취한다. 남성 시청자는 여주인공을 학대하는 부유한 남편이 되었다가 여자를 구해내는 탐정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TV를 수선하러 들렀다가 여주인공의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 수리공이 되기도 한다. 성인영화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평면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다양한 캐릭터에 번갈아가며 몰입할 수 있도록.

심야의 성인영화는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넘어서, 성 역할극을 제공하는 두 개의 목적을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