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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순수성이 판단력을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by 늙은소 2005. 7. 5.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 뜨는 분위기이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궁금하여 몇 번 재방송을 보았는데, 최근의 경향이기도 한 아역 캐릭터가 눈에 뜨인다. 여자아이의 맑은 미소가 간간이 화면에 등장하는 것이 마치 CF를 보는 듯 하다.
...
요즘 아역들은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역이 많이 나오던 드라마들을 되돌려보면, 다소 평면적이기는 해도 다양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로 등장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착하든, 반항적이든.. 먹을 것을 밝히거나 어리석든.. 아이들은 나름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 2년 사이에는 어른을 걱정하는 지나치게 조숙한 아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파리의 연인'에서도 그랬고,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도 그랬다. 다소 모자란 부모들을 대신 챙기고 나서는 아이들은 실수하는 법도 없고, 어른보다 더 영악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1년 만에 상황이 바뀌었다.

순수의 결정체가 화면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통 하얀 옷에 뽀얀 피부, 검은 눈망울로 웃기만 하는 애들이 광고와 드라마, 영화를 점령하고 있다.

김삼순에 나오는 '미주'는부모의 죽음으로 실어증에 걸린 어린 여자아이이다. 그러나 어두운 법이 없다. 밝게 미소만 지으면 되는 그 아이의 역할은 다분히 전략적이다. 여주인공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인 까닭이다. 아이는 분명 '삼순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한 걸음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 때의 감동을 제공하기 위해 실어증에 걸린 순수한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식의 구성은 제법 흔한 편에 속한다. 아이의 순수함이 거짓된 어른들의 잘못을 가려내고, 진정으로 착하고 선한 사람을 판단해내리라는 기대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이건 한참 잘못된 생각이다.

어린 시절 내가 좋아하고 따랐던 어른들을 생각해보면 그 답은 분명해진다. 언니는 고모부를 좋아했고, 나는 작은아버지를 좋아했다. 우리가 좋아했던 친척어르신들은 서로 달랐으나, 그 이유는 동일했다. '종합선물세트' 때문. 아이들은 조금만 잘해줘도, 혹은잘 놀아주거나 용돈을 주거나 선물을 주는 것 만으로도 쉽게 넘오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면 좀 예쁘다든가..(조카가 나를 잘 따는 이유..흐흐흐)

아이들 역시 어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으리라 생각해선 곤란하다. 그러나 가끔은 아이들의 순수함이 어떠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우리가 미쳐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믿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키우고 있는 고양이에게 가끔씩 기대하는 무의식적인 믿음과도 연결된다.

새벽에 깨어나 문득 공포에 휩싸일 때가 있다. 낮게 드리운 천정의 평면화된 어두움이 짓누르는 듯 하여 두려워진다. 그때 나는 본능적으로 고양이를 찾게 된다. 품에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평소와 달리 고양이가 다른 곳에 있다면.. 그 두려움은 더욱 커지게 된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예견하지 않는다던가.. 또한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 귀신과 같은 존재를 동물들은 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이 떠오르며.. 고양이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판단력의 높은 기대를 부여하는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달리 보면, 아이들과 동물들에게 거는 이러한 기대는 '판단력'의 부재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우리의 모습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저 대신 판단해줄,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더 이상 판단할 힘도 의지도 없는 우리를 대신할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떠한 윤리와 도덕, 법과 질서, 그리고 진정어린 마음도 해내지 못한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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