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선형적 사유

Inside

by 늙은소 2006. 1. 30.

우리는 눈을 뜬 채 숨을 허덕이며 어둠속의 촛불을 펼치고, 그 희미한 빛을 설탕물처럼 들이마신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덧없는 안심인가. 시선을조금만 옮겨도눈에 익은 세계를 에워싼 어둠이 눈에 밀려와 조금 전까지 위안이 되었던 촛불의 동근 빛은 그것을 둘러싼 공포의 윤곽임이 분명해진다. 방을 공허하게 만드는 등불을 조심하라. 네가 자지 않고 앉아 있는 뒤에 그림자가 주인인 양 버티고 서 있지 않을까 뒤돌아보지 말아다오. 차라리 불을 밝히지 않은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안전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너의 끝없는 마음을 융합시켜 어둠의 묵직한 마음이 되도록 힘쓰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너는 숨을 죽여 조그마하게 움츠린 채 얼굴을 덮은 두 손 안에서 네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얼굴 윤곽을 막연한 몸짓으로 이따금 투사해 보는 거다.

R.M. 릴케 - 말테의 수기 중

...

'양들의 침묵' 구도를 교묘하게 비틀어 상업화시킨 범죄드라마가 최근 채널 CGV에서 방영 중이다. 이 드라마를 본 뒤 잠들면 어김없이 잠자리가 편치 않음에도 빠지지 않고 보내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나약해 보이는 여성 수사관과 그녀의 트라우마를 범죄해결에 이용하는 수사반장의 관계는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은 복잡성을 드러낸다.

어린 시절 소아성애자에게 납치되어 18개월간 그와 생활해야했던 그녀는 떨쳐낼 수 없는심각한 정신적 장애와 함께 성장한다. 성인이 된 그녀가 직면해야하는 외상의 후유증은 공포나 타인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어린시절 그녀는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납치한 그를 철저히 분석해야했고, 극도로 날카로운 상태에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며 상대를 안심시킴으로써 탈출할 기회를 노려야만 했던 것이다. 여러 달에 걸쳐 그녀는 그와 자신을 동화시켜 그의 행동을 이해해야했고, 그 과정에서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두 개의 노력을 취해야만 하였다. 완벽하게 타인이 되는 훈련을 통해 그녀는 비로소 그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나,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두 개의 자아와 함께였다.

연쇄살인현장에서 그녀는 범죄자의 심리를 꿰뚫으며 그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고,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는 데이바지한다. 그녀의 갈등은 여기에서 더욱 증폭된다. 그들을 지나치게 잘 이해하기 때문에그들의 폭력성 안에 숨은 나약함과 비겁함을 증오하지만, 자기 내부에 그들과 동일한 폭력성이 깃들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그 갈등을 기폭제로삼는 존재, 그녀를 끊임없이 갈등의 참화 속에 내던지는 존재가 바로 수사반장의 역할이다. 그리고 그는 다른 의미에서의 한니발 렉터이다.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렉터는 FBI요원인 스털링의 수사를 돕고 수사방향을 설정하도록 하는 수사반장과 같은 역할과, 그녀가 ?는 범인과 연장선상에 있는 범죄자의 역할 두 개를포함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 드라마에서 범죄자들은 종종 주인공인 여 수사관 레베카를 자신의 표적으로 삼곤 한다. 범죄자를 지나치게 잘 이해하는 그녀는그들의 범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며, 세상과의 불일치와 분노를 표현하는 자신의 표현방식을해석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와도 같다. 한니발 렉터가 스털링을 선택하는 것처럼,범죄자들은 그녀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꿰뚫어보는 수사반장 역시 그녀를 선택한다. 전능함에 깃든 잔인함,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애매한 태도로 수사반장은 그녀를 한계상황으로 몰아세운다. 물론 드라마는이 모든 것을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극복의 과정인양 표현하고 있지만, 나는드라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생각하고 인물들의 내면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그들 하나하나를입체화시키는 노력 속으로가라앉는다.

우리는 폭력을 하나의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가 불러온 시각적, 촉각적 결과물로만 인식하는 함정에빠져있다. 하나의 영혼이 다른 하나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 비물질적 폭력의 결과물들을 어떻게 치유해야할 것인지..어떻게 언어화하여 타인에게 이해를 구해야할 것인지.. 나는 늘 그런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야만 하였다. 내가 겪어야 했던 일들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그로부터 무엇을 회복시켜야할 것인가. 결국 이 모든 의문은 상처에 대한 집착이 되어, 자신의 상처를 덧내어 고통을 상기시키는 환자들의 심리와 같이, 영혼에 스스로 칼을 들이대는 상태로까지 전이되고 말았다. 이제는 더 이상 가해자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녀 스스로 가해자와 피해자로 양분되는 인격을 어찌하지 못하게 되는것이다.

어둠 속에 놓이게 된다면.

절대의 정적, 암흑의 순간 속에서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 어둠 속에서 내가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 때 나는 하나가 되어 어둠의 수면 위로떠오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