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해마다 많은 수의 고등학생이 수학여행 길에 오른다.
우리 때는 대부분의 수학여행지가 경주였고, 단체로 대여하는 버스와 숙박비가 주를 이루는 경비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그 수학여행비가 부담스러운 어머니는 내게 수학여행을 가지 말라 하셨고, 나는 쉽게 포기했다. 서운한 마음은 없었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다만 조금 난감할 뿐이었다. 돈이 없어서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 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있지도 않은 집안 행사를 지어내 거짓말로 둘러대야 했다. 그런 게 번거로울 뿐이었다.
02.
거대한 선박과 함께, 수 백명의 아이들이 차가운 바닷물 속에 가라앉았다.
한 달 전의 일이다.
비리는 끝이 없었다.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던(설마 이 정도로 사회가 부패했을 줄이야) 모든 기준이 지켜지지 않았음이 밝혀졌고.
나는 이 나라에 대해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믿음마저 버리게 되었다.
첫 날에는 배 안에 아직 아이들이 살아남아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고
그 다음 날에는 그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절망하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내내 악몽에 시달렸고, 꿈이면 물 속에 잠기는 배 안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소리쳐 부르며 밖으로 나오라며 안간힘을 쓰는 꿈을 꾸었다.
거기에 내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음에도 나는 일주일 내내 밤마다 시달렸었다.
그렇게 2주일을 보낸 후, 비로소 이 나라에 대해 포기하게 되었고.
그 곳에 있는 아이는 구하지 못할지라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딘가의 다른 아이들을 구해보자고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03.
작년 연말부터 재능기부를 할 만한 곳이 없을지 집 주변 보육원들을 조금 둘러보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겁도 나고... 시작이 중요한 게 아니라 꾸준히 성실하게 임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므로.
선뜻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 코가 석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호 사태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절망과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작은 것이라도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발성으로 이루어지는 모금 활동이나, 일회성 관심에 그치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죽기 전에 좋은 일 하나 정도는 하고 죽어야지... 뭐 그런 마음도 있었다.
전부터 봐 뒀던 곳에 연락을 해 수학을 가르치기로 하고. 지난 주 첫 수업을 시작했다.
경험이 부족해 자잘한 실수도 많이 했고, 아이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는 게 조금 힘이 들었지만.
요즘은 책도 많고... 인터넷 강의도 무료로 볼 수 있는 게 많아서... 내가 부지런을 떨면 그런 문제들은 빠르게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BS강의 처음 봤는데, 아니 이렇게 공부하기 좋은 세상이라니!!!! 크게 놀람)
수학점수가 40점대던데 80점대까지 올려줘야지!!! <- 혼자 김칫국 마시고 있는 중
아이를 만나기 전에는 내가 봉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서 수업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오히려 아이에게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기가 학원이고, 내가 학원 강사라면.... 내가 아니어도 저 아이는 누군가 다른 강사에게 수업을 들었을 테지만
지금 여기는 내가 아니면 저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칠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이니...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는 순간을, 지금 내가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하게 해주다니...
그게 많이 모자란 나여서 미안하고, 기회를 줘서 고맙고. 그런 마음이 든다.
- 2014년 5월 15일의 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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