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20140515 - 재능기부

by 늙은소 2017. 3. 6.

01.
해마다 많은 수의 고등학생이 수학여행 길에 오른다.

우리 때는 대부분의 수학여행지가 경주였고, 단체로 대여하는 버스와 숙박비가 주를 이루는 경비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그 수학여행비가 부담스러운 어머니는 내게 수학여행을 가지 말라 하셨고, 나는 쉽게 포기했다. 서운한 마음은 없었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다만 조금 난감할 뿐이었다. 돈이 없어서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 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있지도 않은 집안 행사를 지어내 거짓말로 둘러대야 했다. 그런 게 번거로울 뿐이었다.


02.
거대한 선박과 함께, 수 백명의 아이들이 차가운 바닷물 속에 가라앉았다.
한 달 전의 일이다.

비리는 끝이 없었다.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던(설마 이 정도로 사회가 부패했을 줄이야모든 기준이 지켜지지 않았음이 밝혀졌고.
나는 이 나라에 대해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믿음마저 버리게 되었다.

 

첫 날에는 배 안에 아직 아이들이 살아남아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고

그 다음 날에는 그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절망하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내내 악몽에 시달렸고, 꿈이면 물 속에 잠기는 배 안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소리쳐 부르며 밖으로 나오라며 안간힘을 쓰는 꿈을 꾸었다.

거기에 내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음에도 나는 일주일 내내 밤마다 시달렸었다.

 

그렇게 2주일을 보낸 후, 비로소 이 나라에 대해 포기하게 되었고.

그 곳에 있는 아이는 구하지 못할지라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딘가의 다른 아이들을 구해보자고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03.
작년 연말부터 재능기부를 할 만한 곳이 없을지 집 주변 보육원들을 조금 둘러보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겁도 나고... 시작이 중요한 게 아니라 꾸준히 성실하게 임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므로.
선뜻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 코가 석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호 사태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절망과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작은 것이라도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발성으로 이루어지는 모금 활동이나일회성 관심에 그치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죽기 전에 좋은 일 하나 정도는 하고 죽어야지... 뭐 그런 마음도 있었다.

전부터 봐 뒀던 곳에 연락을 해 수학을 가르치기로 하고. 지난 주 첫 수업을 시작했다.
경험이 부족해 자잘한 실수도 많이 했고, 아이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는 게 조금 힘이 들었지만.
요즘은 책도 많고... 인터넷 강의도 무료로 볼 수 있는 게 많아서... 내가 부지런을 떨면 그런 문제들은 빠르게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BS
강의 처음 봤는데, 아니 이렇게 공부하기 좋은 세상이라니!!!! 크게 놀람)

수학점수가 40점대던데 80점대까지 올려줘야지!!! <- 혼자 김칫국 마시고 있는 중


아이를 만나기 전에는 내가 봉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서 수업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오히려 아이에게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기가 학원이고, 내가 학원 강사라면.... 내가 아니어도 저 아이는 누군가 다른 강사에게 수업을 들었을 테지만
지금 여기는 내가 아니면 저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칠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이니...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는 순간을, 지금 내가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하게 해주다니...
그게 많이 모자란 나여서 미안하고, 기회를 줘서 고맙고그런 마음이 든다.

- 2014년 5월 15일의 일기 -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옥상의 클라라  (0) 2017.05.29
사람 죽이는 타일  (11) 2017.05.28
20140821 - 재능기부  (5) 2017.04.23
20140701 - 재능기부  (2) 2017.03.08
20140622 - 재능기부  (16) 2017.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