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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0140622 - 재능기부

by 늙은소 2017. 3. 7.

01.

5월에 시작한 재능기부는 매 주 방문을 하여 2시간씩 수학을 가르치는 일이다.

일반 봉사가 아니라 수학 과외 형식이어서 수업 준비를 하는데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보통 보육원에서 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방문을 한다)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다,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봉사자의 방문이 적은 곳이라던데.. 여러모로 힘든 상황에 처한 곳이고, 무엇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가 정신적인 문제까지 안고 있어서 힘이 든다.

 

평일에 사무실에 나와 일을 하고 토요일마다 보육원에 찾아가 무보수로 수학을 가르치다보니 일요일이면 잠을 자는 것 외에는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되었다.

 

02.

현재 가르치고 있는 아이는 중학교 1학년으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족과 함께 생활을 하였고,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다 1년 전 보육원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은 본격적으로 수업을 하기보다는 아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나누곤 하는데, 초등학교 3학년 까지 공부를 잘 하였다던가, 퍼즐 맞추기를 좋아하였다는 등. 가정환경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을 종종 찾게 된다.

 

'왜 이 아이의 가정은 순식간에 폭력으로 얼룩지게 되었을까?'

 

이러다보니 아이가 초등학교 5, 6학년 과정을 거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중학교에 막 입학을 한 상태였고, 수업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중이었다.

 

일주일에 두 시간 수업으로 5, 6학년 과정을 가르치고, 동시에 중학교 1학년 과정까지 가르쳐서 시험준비를 시키는 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아이가 공부에 대한 의지는 있으나, 그러한 방법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착하고 영민한 아이여서 수업 진도를 빠를게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계속 브레이크가 걸린다. 내가 설명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그것을 푸는 방법을 도무지 수용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쉽게 말해... 라면 끓이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하면

 

물의 양을 설명하고, 그것을 냄비에 담아 끓이고, 그 다음에 라면 스프를 넣는다고 설명하면 아이는 그 내용을 이해하고 또 기억해낸다. 그런데 막상 실습을 시키면 물이 끓기까지 기다리지 못해 찬 물에 면을 넣어버린다거나, 스프를 찢어서 뿌려 넣기 귀찮다며 비닐을 찢다 말고 비닐채 끓는 물에 넣어버리는 식으로 수학 문제를 푼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자꾸만 틀린 답이 나오는지, 자신이 하는 방식이 실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여러 번 말을 해주어도 그 방법을 바꾸려고 들지 않아 지쳐서 돌아오는 일이 많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지치고, 학대 받은 아이였기 때문에 혼을 낸다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 한 번 없이...계속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만 수업을 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도 힘이 든다.

무엇보다 아이의 이런 특성 때문에 수업 진도보다는 정서적 안정을 더 중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었고, 아이가 공부하기 싫다고 하면 그냥 같이 놀아주라는 조언도 들었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왕복 세시간 거리 보육원에 가서 수업은 전혀 하지 못한 채 그냥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03.

이런 활동을 10년 이상 해오신 분과 수업이 끝난 후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보육원 아이들 중 이런 사례가 매우 많다고 한다. 지식의 습득보다 더 시급한 것이 태도나 행동, 습관을 바꾸는 것이라고.

 

일반 가정에서 자란 아이라면 아주 어릴 때부터 밥 먹는 습관이나 TV보는 자세 같은 세세한 태도들에 대해 지적을 받고 훈련을 하면서 다양한 주의를 듣게 되는데, 어릴 때부터 방치되다시피 한 아이들은 그런 경험이 부족한 상태로 청소년기에 들어서게 되어 자신에게 익숙한 태도나 습관, 방식을 바꿔야 하는 상황에 대해 큰 거부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보육원 아이들에게 부족한 건 책이 아니라, 그 책을 옆에서 함께 읽어 주고, 책을 읽을 때 옆에서 지켜 봐 줄 사람이라는 이야기에 크게 공감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보육원에 책은 많았다. 그런데 그것을 읽는 아이가 드물었다.

많은 아이들이 쉬는 시간이면 앉아서도 아니고, 누워서 TV를 보고 있고, 심지어 운동장에 나가 뛰어노는 일조차 하려 들지 않는다. 밥 먹고 누워있고, 밥 먹고 누워있고 그러다 잠이 들고. 그 무력한 분위기에 보육원 아이들이 끌려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림책은 그나마 읽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으나 그마저도 글자를 읽는 게 귀찮아 만화책도 생각보다 그리 인기가 있지 않았다. (학습용 만화같은 것들) 귀찮은 일을 하라고 시키는 사람도 없고, 그 귀찮은 걸 했을 때 칭찬을 해 주는 사람도 없으며 반응을 해 주는 어른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한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일주일에 한 번씩 수학 수업을 듣겠다고 찾아오는 이 아이를 대단하다고 생각해 줘야 하며, 무리해서 수업 준비한다고 너무 고생하지 말고, 아이와 오래 함께 할 수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왔다.

 

지금 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수학 성적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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