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20140821 - 재능기부

by 늙은소 2017. 4. 23.

01.

수학 수업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났다. 놀라운 성과를 보이며 성적이 급상승하였다면 영화같고 좋겠지만 현실은 그와 반대로 성적이 더 떨어지고 말았다. 가르치기 전 수학 점수가 40점이었는데, 내게 수학을 배운 뒤 26점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하하핫...... ㅠㅠ....... (저런 점수가 실제로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돈 받고 하는 과외라거나, 학원이었다면 아마도 난 바로 잘렸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토록 무능하다니!!!! 뭐 이런 것도 있지만.... 시험 문제가 너무 쉬워서 찍을 필요조차 없는 난이도인데 그걸 틀린다는 걸 이해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충격 요인이었다. 그 동안 배운 것을 조금만 생각했더라도 도저히 저 점수는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으로도 설명하고 몸 동작으로도 익히게 해보고 암기 카드로 만들어서 외우게도 해보고 온갖 방법을 썼는데 4주 동안 저걸 계속 틀리는 거다. (그 사이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고, 화 한 번 내지 않으며 4주 간 같은 것을 가르치다보니 어디 종교에라도 귀의해야 할 것 같았다고나 할까.)

머리가 좋은 아이인 건 분명했다. 그런데 -1-1=-2를 4주 동안 가르쳤음에도 계속 틀리는 것이다. 얘가 나를 놀리는 건가?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일까? 일부러 틀리는 건가? 내가 싫은가? 나를 괴롭히려고 저러나? 논리적으로 이 아이의 행동이나 결과가 이해되지 않으니, 그 원인을 알 수 없고 또 해결할 방법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방법에 크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에게 배우면 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인데 자격도 없는 내가 이 아이의 시간을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 이 시기에 제대로 공부하도록 만들어놓지 않으면 보육원을 나가서 앞 날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고 아득해지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 수업 방식을 바꾸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학교 성적 같은거 잘 나오지 않더라도 사회에 나가서 머리 좋고 일 잘한다는 소리라도 들으면 될 게 아닌가. 어차피 대학 가기는 어려운 환경이니 진학을 대비한 수업보다는 사고력을 발전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기로 한 것이다.

 

02.

그렇게 시작한  수학 수업은 조금은 이상한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시간 중 한 시간은 기존의 수학 수업으로 학과 진도를 나가고, 다른 한 시간 동안 사고력 수학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머리가 좋은 아이인데 심하게 학대를 받다가 보육원에 오게 된 경우여서 감정 기복이 심하고, 단 몇 분 만에 전혀 다른 아이가 되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잘 웃고 대화도 잘 하다가 2~3분 만에 다른 아이가 되어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을 안 하는 것이다. 내가 무언가 실수를 한 게 있는가 싶어 조심스럽게 물어도 보고, 하나하나 대화를 되짚어보아도 문제될 만한 것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러느냐 물으면 아이는 '선생님 때문이 아니다. 죄송한데 저도 어쩔 수가 없다'는 식이었다. 그런 날이면 준비해 간 수업을 하나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집에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수학 수업을 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다른 내용의 수업을 2~3가지 더 준비하기 시작했고, 아이가 여기에 흥미를 보이기에 당분간 수학 성적에 연연하지 말고 여기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위 사진은 수학 시간에 아이와 함께 만든 것 중 하나로 종이로 만드는 관절 로봇이다. (미니 로봇 인형과 스네이크 봇)

단위 블록를 만들어 원 유닛으로 연결하여 조립하는 방식으로, 원으로 된 관절 연결부가 360도 회전하기 때문에 각 관절이 모두 움직이는 종이 로봇이다.

2학기 수학 과정에 원과 도형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아이가 도형 문제를 워낙 싫어해서 미리 도형에 대한 특징도 익힐 겸 함께 만들면서 '원'이란 어떤 도형인지 '사각형과 직사각형'의 특징이 이 로봇의 형태에 끼치는 영향 같은 것을 설명하면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걸 어찌나 좋아하던지 선생님이 종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꿔놓았다며 무척이나 신나했었다.

중앙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떨어진 점의 집합이 원인데, 바로 그 점 때문에 관절로서의 기능이 가능하다는 것. 문을 연결하는 데 사용되는 경첩이라든가, 사람의 손가락 구조 같은 것을 설명하고 대화를 나누며 아이에게 스스로 생각해보도록 질문을 던지는 등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진은 Paperlock 이라는 시스템으로, 앞의 것과 비슷한 종이 로봇이다. 역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으며 여러 부속을 조립해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는 방식이다. 앞의 것보다 좋은 점은 풀을 전혀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해체가 가능하고 만들기가 더 쉽다는 것이다. (도면들은 세계 각지의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구한 것으로 영국, 일본, 미국, 이탈리아 등 안 다녀본 사이트가 없는 것 같다)

이 도면은 원을 십자 연결부로 연결해 각 유닛이 360도 회전이 가능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원을 칼로 도려내는 작업이 엄청난 노가다다. 갖고 놀 수 있으려면 꽤 많은 유닛이 필요한데, 모든 유닛에 원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백 개 이상의 원을 칼로 도려내야 했고, 자연스럽게 회전하려면 원을 매끄럽게 잘라야 해서.... 결국 손가락 관절에 무리가 오고 말았다. 그 덕에 손가락이 잘 안 구부러지는 중이다)

 

 

"선생님이 왜 종이로 이런 걸 만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종이가 가볍고 싸서요?"

"맞아. 그것도 큰 이유 중 하나란다. 선생님이 운전을 못해서 무거운 걸 들고 여기까지 오기가 힘들거든. 그런데 그것도 있지만 종이는 가공하려면 가위로도 충분하자나. 풀만 있으면 붙일 수도 있지. 하지만 우리가 금속이나 나무로 이런 걸 만든다면 톱이나 용접기 같은 걸 써야 할테니까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니? 다루기 쉬운 대신 종이는 망가지기가 쉬워. 젖기도 하고, 찢어지기도 하니까. 만든 게 망가지고 찢어졌다고 속상해하지 말고, 선생님한테 이야기하면 다시 만들어줄테니까. 네가 만들어보다가 실패하더라도 속생해하지 말고, 실패할 걸 두려워 하지는 말자. 그러니까 막 가지고 놀고, 아무렇게나 조립도 해보고 그러는 거야"

2주 정도 Paperlock으로 이것저것 조립을 해보면서 수업을 진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로봇공학을 주제로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꽤 다양한 질문과 대답이 오가게 되었다.

 

03.

만들기 외에도 수학 시간에 미로 찾기과 퀴즈 풀기도 하고 있다.

요즘 방정식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 녀석이 분명히 풀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문제 형태로 주면 못하겠다, 어렵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간다며 포기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레이튼 교수' 시리즈에 나온 퀴즈를 카드 형태로 만들어서 하나씩 풀어보게 했더니 잘 풀더라는 것이다.

 

이 녀석이 웃긴 게 문제집에 있는 건 하기 싫은 공부지만, 같은 내용을 카드로 만들어 주면 재미있는 놀이라고 생각한다.

'10년 뒤 형과 동생의 나이는?'

'모양과 크기가 같은 추 8개 중 무게가 다른 하나 찾기'

'늑대 3마리와 병아리 3마리를 간 건너로 옮기기' 

같은 고전 퀴즈들인데 이걸 카드로 만들어 주니 무척 좋아했다. 자기 힘으로 풀 때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며 머리를 쥐어 뜯으며 푸는 모습을 보이니... 드디어 이 아이에게 희망이 보인다고 할까나... 

학교에 가져가서 친구들에게 풀어보라며 내주고 싶다기에, 퀴즈 100개를 100장의 카드로 만들어 퀴즈 세트 한 벌을 만들어 주었다.

 

04.

이것은 서점에서 찾아낸 미로 책으로 아이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 아이의 두뇌가 어느 쪽으로 발달하였는지, 잘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파악할 요량으로 미로 풀기를 시켜보았는데 미로를 좋아할 뿐 아니라 전략을 구사하는 걸 알게 되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볼펜으로 풀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던 아이가 미로를 풀어보라고 주었더니 필통에서 바로 샤프와 지우개를 꺼내지 뭔가. 잘못된 길로 갔을 때 그 길로 가게 된 지점으로 돌아가 갈림길 입구에 x 표시를 하여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거나, 지우개로 지울 건 지우면서 경우의 수를 줄여나가는 등... 맞는 길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니, 이 아이가 몰라서 못 고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맞는 길과 틀린 길이 있을 때, 그 둘을 구분하고 다시는 틀린 길로 가지 않도록 스스로 기호를 만들어 표시를 할 줄 안다는 건데. 미로를 풀면서는 스스로 생각해 낸 방법을 공부를 하면서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일 뿐. 그 동안 몰라서 못하는 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이런 부분을 언급하며 네가 무척 좋은 전략을 사용했다고 칭찬해주고, 문제를 풀 때에도 적용해본다면 좋지 않겠느냐 설득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또한 대학 동아리 중에는 학생들이 만든 로봇으로 어느 로봇이 더 빨리 미로를 빠져나오는지 시합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며 미로 찾기와 공부와의 상관관계라든가, 인공지능이란 무엇인지 '지능의 측정'과 같은 것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어보기도 했다. 너에게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고 재능이 있으니 공부에도 조금 관심을 가져보자는 뭐 그런 대화...

이 책에 나오는 미로가 굉장히 어려운데, 어렵기만 한 걸 넘어서 상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유형의 미로도 꽤 많은 편이다. 위의 그림은 3차워 구조를 이해해야 풀 수 있는 미로로, 한 칸 씩만 올라가고 내려갈 수 있는 규칙이라 그림을 공간으로 이해해야 풀 수 있다.

...

오늘은 공부하기 싫어요. 입을 다물어버리면 미로 풀자며 책 꺼내고, 미로가 싫다고 하면 퀴즈 풀자며 카드 꺼내고, 그것도 싫다고 하면 만들기를 하자며 종이와 가위, 풀을 꺼내는 등 2~3가지 이상의 수업을 준비해갔더니... 처음에는 뭐 이런 이상한 선생이 다 있나 싶어하다가.. 나중에는 나처럼 준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놀라워 하더니 요즘에는 수학이 가장 재미있다며 나중에 자기도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다지 뭔가.

(아니 그런데 내 직업이 수학 선생님은 아닌데.... 심지어 전공도 전혀 그게 아니고....) 아무튼 조금씩 달라지는 아이를 보니 보람차다고나 할까. 하하하하하핫!!!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옥상의 클라라  (0) 2017.05.29
사람 죽이는 타일  (11) 2017.05.28
20140701 - 재능기부  (2) 2017.03.08
20140622 - 재능기부  (16) 2017.03.07
20140515 - 재능기부  (0) 2017.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