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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0140701 - 재능기부

by 늙은소 2017. 3. 8.

01.

수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면 생각한다.

'무엇때문에 나는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수업시간에 아이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도 많은 시간을 투입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가 사용된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의 각오는 해두었었다.

아이가 내게 고마워하길 바라지 말자. 보육원에 성정이 거친 아이들도 많을 것이며, 폭력적인 아이들도 많을테니 그 아이들과 어울려 어느 날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더라도 너무 상처 받지 말자. 성적이 오르지 않고 수업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말자.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욕하고 험담을 하더라도 상처 받지 말자. 이런 각오 말이다.

 

아이는 아이고, 아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지점이 있다. 무엇보다 상처가 많은 아이가 아닌가. 거기다 일반 가정에서도 다루기 힘들어한다는 사춘기 중학생이니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이나 스스로를 설득하고 각오를 다졌으나.. 수업을 하고 난 다음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마음 일부가 무너질 때가 많았다.

 

그런 날이면 바로 집에 오지 못한 채, 두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거리를 걸으며 조금 전 있었던 수업시간에서의 내 모습과 아이와 나눈 대화 등을 곱씹으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답을 찾는 일을 반복했다.

 

 

어느 날은 집에 돌아온 뒤에도 마음이 편치 않아 고등학생 시절 읽었던 책을 꺼내 들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서문.

 

나치 시대 독일에서 저항운동을 펼치다 붙잡혀 사형당한 어린 학생들에 대한 기록을 담은 책이다.

내가 종종 찾아 읽는 문장은 이 책의 서문으로, 옳은 일을 하되 그것이 영웅적이라며 스스로 도취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문장이다.

지금이 아니어도, 삶에서 늘 함께 해야 할 문장이라고 늘 생각해왔었다.

 

02.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그곳을 나와 자립해야 한다.

이 때 정착금을 받게 되는데 정착금은 지자체에 따라 금액의 차이가 있으며 보통 200만원에서 500만원이 주어진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또래 아이들이 함께 나와서 정착금을 모아 방을 구한다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보증금 천 만원이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이고, 사회생활의 시작 단계에서 주거 비용만큼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장벽은 없으니까.

 

하지만 현실을 접하게 되자.. 보육원에서 나온 아이들 거의 대부분이(90% 이상) 극빈층으로 순식간에 떨어지는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정착금 자체가 아이들 손에 제대로 쥐어지지 않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다.

 

보육원 아이들 중 일가친척이 단 한 명도 없어 보육원에 오거나, 길에서 버려져서, 혹은 미아가 되어서 보육원에 오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이 점이 처음에는 무척 놀라웠다) 보육원에서 만난 아이들 중 상당수는 부모 중 적어도 한 명은 살아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가까운 친척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아주 어릴 때 길에서 버려져서 보육원에 있게 된 아이는 10%도 되지 않았다)

아이를 보육원에 보낸 바로 그 사람들이, 아이가 성인이 되면 아이의 정착금을 가져가버리는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 끼리 사이가 좋은 경우 역시 드문 일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는 같은 보육원 출신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친구처럼 지낸다거나 어려울 때 서로 돕거나, 자신이 자란 보육원에 찾아오는 등의 묘사를 하곤 한다 그게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인지 봉사활동을 하며 알게 되었다.

왜 아이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한지. 보육원 출신인 것을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하며,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나중에라도 나를 찾는다거나 떠올리는 일조차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마음 역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게 고마워하긴 커녕 나중에 길에서 만나더라도 나를 모른척 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03.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성인이 되어 보육원에서 나가게 되었을 때, 미리 직장을 구해놓아야 정착금을 생활비로 쓰는 일이 없게 되고, 그 돈을 시작으로 월급을 받아 조금씩 돈을 모아야 극빈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계산이 된다.

 

그러므로 보육원 아이들에게 고등학교 과정은 직장을 얻기 위한 준비 단계이고, 그 때문에 일반 인문계에 진학하는 경우는 아예 없으며 모두 직업 학교에 진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의 교육 수준이 너무 낮아서 바로 그 직업 학교(기술 고등학교) 수업조차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초등학교 기초 과정부터 제대로 공부를 한 적이 없으니 기술 고등학교 수업을 들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간신히 졸업을 하더라도 직장을 얻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설령 취업을 하더라도 얼마 못 버티고 잘리거나 그만두고는 나와 손 쉬는 아르바이트나 서빙을 하면서 20대 초를 그냥 보내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래가 너무 뻔히 보이는데 그것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타이밍이 바로 초등학교-중학교 과정에서 공부를 어느 정도로 하는가에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게 되면서 내가 가르치는 아이에게 자꾸만 조바심이 든다.

보육원에 있는 다른 어떤 아이보다 머리가 좋은 아이였고, 순수하고 착한 아이인데... 지금 우리 수업을 조금만 열심히 듣고 본인이 조금만 노력한다면... 주어진 뻔한 인생에서 벗어나 조금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잘 보이는 것이다.

 

우리 손을 왜 잡지 않느냐고... 지금 네가 있는 곳이 벼랑 끝인 걸 왜 모르냐고 소리치고 싶은데... 차마 겁을 먹게 할 수 없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알아서 아이가 자기 마음을 잡아주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게 힘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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