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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기록

00년 0월 0일 - 꿈에 대한 첫 번째 기록

by 늙은소 2018. 2. 16.

이 글은 학부 3학년 때 쓴 글로 당시 우리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주제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수업시간에 프로이트가 제대로 다뤄진 것은 아니어서 책은 각자 알아서 읽어오는 식이었다. (심리학과 수업이 아니라 독문과 수업이었다)

수업의 주된 내용은 각자 자신의 꿈을 글로 기록하고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발표하는 일이었다.

것은 그 때 쓰여진 글로 태어나 처음으로 쓴 첫번째 꿈의 기록이다.

...

지금까지 꿈을 해석하는 동안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R이 내 삼촌이라는 생각을 한 후, 꿈에서 나는 그에게 따뜻한 애정을 느낀다. 이 감정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 이제 새로운 사태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다. 꿈속의 애정은 잠재적 내용, 꿈의 배후에 있는 사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립한다. 그것은 꿈-해석을 가로막기에 적절하다. 이것이 바로 그 애정 본연의 임무일 것이다. 나는 내가 얼마나 마지못해 꿈-해석에 임했고, 되도록 꿈-해석을 뒤로 미루려 들었으며 말도 안 되는 꿈이라고 선언했는지 잘 기억하고 있다. ... 나는 꿈-해석을 끝마친 후 거부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R이 생각이 모자란다는 주장이었다. 내가 R에게 느끼는 애정은 잠재적 꿈-사고가 아니라, 내 거부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꿈이 잠재적 내용과 비교해 이 점에서 반대로 왜곡되어 있다면, 꿈에서의 외현적 애정은 이 왜곡을 위한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여기에서 <왜곡 Entstellung>은 의도적인 것으로, ,위장.의 수단으로 증명된다. 내 꿈-사고는 R에 대한 비방을 품고 있다. 내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그와 반대되는 애정어린 감정이 꿈에 이입된 것이다.

[꿈의 해석] p 203~ -왜곡 중에서

* * *

 

책에서 이 부분을 읽은 후 고등학교 3학년 때의 꿈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 보았다.

 

교복을 입고 있는 친구 한명을 제외하고 주위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다. 다른 꿈에서 종종 그랬던 것처럼 시선은 육체를 벗어나 그녀와 나를 동시에 관찰한다. 두 사람은 매우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친구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며 나는 그녀가 누구인 지 알 수 없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으나 대화 역시 들리지 않는다. 순간 눈앞이 밝아지면서 눈 높이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한 사람이 등장한다.

빛과 함께 나타난 인물은 3학년이 시작되기 전 봄방학 기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학교 선생님이었다. 당시 학생회 임원이었던 나는 학생회 담당 교사였던 그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었다. 우리는 학교 행사 진행이나 학교에 써 붙인 대자보 문제 등 여러 사안으로 학교측과 마찰을 일으켰다. 당시 학교 내외부는 전교조 문제로 시끄러웠다. 전교소 소속이었던 국어 선생님이 우리들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는데 그는 결국 2학년 말에 강제로 학교를 떠났고, 학교측은 학생회 소속인 우리들을 골치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그는 이런 우리를 학생회 담당교사로서 상대해왔다. 

그는 새벽 귀가길에 사망했고 우리는 그의 영안실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여린 감성의 사춘기 소녀들의 눈물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한 것이었다.

 

꿈에서 본 그의 모습은 온화하고 평화로웠다. 부드러운 빛과 함께 나타난 그는 1미터 정도 높이의 공중에 떠 있었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싶었다. '그'여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있는 '빛' 때문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손을 잡는다.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 손을 잡지마!’ 옆에 있던 친구의 외침이었다.

그녀는 내 팔을 잡고 계속 소리쳤다. ‘이 손을 놔! 놓아야 해!’ 잠시 갈등하는 사이, 잡고 있던 손이 아닌 다른쪽 팔로 시선이 움직였다.

그에게는 있어야 할 왼팔이 없었다. 빈 자리를 감싼 외투가 펄럭인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았다. 그는 사라졌고 빛도 함께 사라졌다.

 

두 번째 꿈이 이어졌다.

두 사람이 내게 걸어온다. 중년의 남녀로 40대 중반정도 되어 보인다. 그들은 두꺼운 털외투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그 때문인지 두 마리의 거대한 짐승처럼 보인다. 두 사람이 내게 다가오자 나는 그들이 왕과 왕비라고 생각한다.

여자가 내게 말한다.

아까 꾼 꿈을 기억합니까?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을 데리러 온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따라오세요

나는 꿈속에서 직전의 꿈을 생각해냈다. 그것이 꿈이기 때문에 꿈을 떠올리는 지금은 꿈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미 몇년 전 죽은 사람이며 나를 죽음의 세계로 데려가려 했던 게 맞다고 확신하게 된다. 두려운 마음으로 두 사람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거리는 황량했으며 서부영화에서 본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짚풀더미가 거대한 공이 되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거리. 목조 건물은 낡고 사막에서 불어온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마을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그녀가 말한다. ‘이제 곧 버스가 올 겁니다. 그것을 타고 여기서 빠져나가세요.’ 나는 조급한 마음이 되어 버스가 빨리 도착하기를 바란다. 조금 전 꾸었던 꿈이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하루 빨리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다.

 

버스가 멈춰 섰고 앞문이 열렸다. 이제 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나는 주저한다. 알 수 없는 저항감에 몸이 굳는다주위를 둘러본다. 내가 타기만을 바라는 두 남녀와 버스 운전사의 표정이 의심스럽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전사의 발이 보인다. 신발을 신고 있지 않은 그 발은 하얀 양말을 신은 것처럼 보인다. 눈을 찌푸리며 다시 보니 양말이 아니라 붕대였던 게 확인된다붕대의 형태만으로도 정상적인 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기사의 발은 한참이나 부패해 형태를 잃은 지 오래였다. 붕대 사이로 진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순간 떠오른 생각은 어쩌면 이 두 사람이 첫 번째 꾸었던 꿈의 배후일 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가 첫 번째 꾼 꿈의 내용을 그들이 안단 말인가이런 생각으로 버스 타는 것을 거부했고 두 사람은 아쉬운 표정으로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라진 어둠 속에 나는 홀로 남았다.

 

* * *

이것은 고등학교 3학년 1학기가 막 끝날 무렵에 꾸었던 꿈이다. 나는 꿈에서 깨어난 후 이것을 당시 흔하게 접할 수 있던 괴담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자율학습 시간에 지도교사가 자리를 비우면 뒤쪽에 앉은 아이들은 저런 괴담을 하나 둘 꺼내놓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니까.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 나는 사람을 죽이는 꿈이나 세계가 피로 물들어 가는 꿈을 자주 꾸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꿈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다. 

그러나 당시의 꿈들을 하나 둘 기억해내기 시작하면서 몇가지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다.

 

- 첫 번째 꿈에서 내 옆에 있던 친구는 누구인가?

꿈에서 나는 그녀와 매우 친했고 그녀가 내게 손을 놓으라고 외친 것은 나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한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녀의 체형을 떠올려본다. 나보다 작은 키에 약간 말랐지만 연약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녀는 실제로 고등학교 3년 내내 나와 항상 함께 했던 친구 H였을 것이다.

 

- 두 번째 꿈에 등장한 중년의 남녀는 누구인가?

나는 그들의 얼굴을 분명히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남자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하였었다. 내가 본 것은 여자의 얼굴이었고, 내게 말을 하는 것도 여자 쪽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내 어머니일 것이다. 주름지고 늙은 어머니가 아닌 결혼 전 찍은 흑백 사진 속의 어머니. 내가 그녀를 왕비라고 생각한 것은 지금처럼 자주 화내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한숨짓고 원망하는 그녀가 아닌. 젊은 시절의 어머니의 모습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를 어머니라고 생각한 또 다른 이유는 옆의 남자가 꿈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그녀를 따라다닐 뿐이었다. 부수적인 존재. 그것은 현실 속의 내 아버지와 같았다. 아무런 의견도 힘도 능력도 없는 존재인 아버지는 꿈에서조차 무시되고 있었다.

 

- 죽은 선생님의 손을 잡는 것과, 부패한 발을 가진 버스기사의 차를 타는 게 과연 죽음을 의믜할까?

당시 꿈에서 깨어난 직후 느낀 공포는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두려운 것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상황에 대한 인식이었다. 첫 번째 꿈에 등장한 따스한 빛은 내가 속해 있던 어둠과 대립해 긍정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내게 손을 내민 사람에게 팔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 빛을 거부하는 길을 택한다. 손을 놓음으로써 어둠을 선택한 게 되었지만 손을 놓은 이후에도 나는 그 결정에 미련이 남았고 아쉬워했다. 손을 놓게 만든 친구의 얼굴은 어둠 속에 가려 마지막 순간까지 보이지 않았다.

빛과 어둠이 선과 악을, 혹은 좋고 나쁨을 의미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때로 빛은 진실을 감추는데 있어 어둠보다 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두 번째 꿈에서 나를 인도한 두 남녀는 버스를 타고 떠나라 말한다. 그러나 역시 버스기사의 발이 부패했다는 사실로 인해 나는 그 버스에 승차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 직전까지 나는 그들이 나를 구하기 위해 나타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을 믿었다

그러나 내 믿음은 생각보다 얄팍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손바닥 뒤집듯 변덕을 부리는 한없이 가벼운 내 믿음의 실체가 한심스러웠다. 그래서 이 꿈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실망에 가까운 감정들로 기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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