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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기록

00년 0월 0일 - 두 번째 꿈의 기록

by 늙은소 2018. 2. 17.

아래와 마찬가지로 학부 3학년이던 때 독문과 수업을 들으며 쓴 글이다.

연휴기간 중 학부시절 제출한 보고서 파일 더미를 발견하게 되면서 예전에 쓴 초기의 꿈들을 다시 읽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다시 읽으니 꿈이 너무 꿈 다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상당히 뻔한 상황들이고 상징들도 어디서 많이 봄직한 것들로 채워져 있어 당시 꿈에 영향을 끼쳤던 영화나 소설 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것은 꿈의 기록 속에서 당시 겪고 있던 가장 큰 문제들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문제들은 시간이 변하면서 다른 문제들로 치환되었다. 초기 글의 주제가 가족 내 갈등을 다루었다면 독립하고 난 뒤에는 홀로 학비며 생계를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경제적 압박,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인간관계의 문제 등이 꿈에 반영될 때가 많았다. 그 흐름을 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초기의 기록을 읽다보니 당시 내가 어떤 문제로 힘들어했는지 그 때의 감정을 되살리게 되어 어린 시절의 내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

낡은 학교의 부속 건물 어둡고 조용한 복도 끝에 나는 서 있다. 모든 교실이 오른편에 줄을 지어 있으며 복도의 제일 끝에 있는 교실만 복도 왼쪽에 있다. 나는 그 교실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저 곳이다. 그들을 데려간 것은.

얼마 전 같은 과 동기가 사라졌고, 나는 그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 ‘가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나는 신경이 쓰였다. 사실 그와 나는 말도 몇 번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를 찾는 게 내 의무도 아니었고 홀로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삼킨 곳이 여기라는 걸 알 수 있었고, 그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구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교실이 점점 가까워진다. 초등학교 시절 희미한 기억 속에 자리한 건물과 비슷한 이 교실의 문 역시 오른쪽으로 미끌어지듯 열리며 경쾌한 소리를 낸다. 드르륵.

교실 안에는 막연한 얼굴의 학생이 두 셋 정도 앉아 있다. 어디선가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꽤 익숙한 노래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냐는 표정을 한 학생이 앞으로 걸어나와,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문을 닫아버린다. 나는 문을 열 용기가 없어 교실 안에 결국 들어가지 못한다.

문이 닫힌 뒤 노래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음악은  이미 내 머리 속에 들어왔고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것이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기세여서 점점 두려워졌다. 어떻게 하면 저 소리를 머리 속에서 내보낼 수 있지? 어떻게 하면 이걸 그만 떠올릴 수 있을까? 

 

사람들이 계속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혹은 모르는 사람들까지. 중앙도서관에서 학생회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내 주위를 무심하게 스쳐가던 학생들이 그렇게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교실 문을 열었을 때 들었던 예의 그 노래가 다시 멀리서 들려왔다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저 노래를 귀 담아 듣지 마세요!’

 

내 방. 부모님과 함께 좁고 추운 내 방에 앉아 있는 중이다. 방에 딸린 작은 부엌문이 열리고 공간은 앞서의 복도로 이어졌다. 모든 곳이 연결되어 있었다. 복도는 사람들을 데려간 교실을 불러왔고 교실이 가까워지며 다시 노래가 시작되었다. 나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은 이미 반쯤 풀려 흰자위만이 보일 뿐이다그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거칠고 괴로운 신음소리만 뱉을 뿐이다. 말을 하고 싶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답답해 손으로 땅을 내리치고 온 몸으로 소리쳤지만 그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다시 어머니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려 했으나 내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 그 잠깐 사이에 아버지 투명해졌고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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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말을 하려해도 신음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꿈을 자주 꾼다. 카산드라처럼 닥쳐올 위험을 알면서도 나는 결국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다.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게 경고(혹은 구출)해야 한다거나 금지된 어떤 것을 열어버린 상황, 전쟁과 살인 선택의 문제..등이 몇 년 간 내 꿈의 주제였다 

이런 맥락에서 몇 년 전의 꿈을 다시 기억해보도록 한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여름방학의 나른함에 취해 평소 같지 않은 오수에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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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미터가 채 되지 않는 다락방은 언제나 먼지와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버리기는 뭐한 그렇다고 쓸 일은 또 거의 없는 물건들을 그곳에 두었으므로 가족들이 다락에 올라가는 일은 좀처럼 없어다.나는 무언가를 찾아 거기 올라갔고, 그 곳에서 정체 모를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것은 외계인의 생체에너지 결정체라 불릴만한 어떤 것이었다. 인류가 생겨나기 전부터 그들은 지구 어딘가에 자신들의 생명 결정 에너지를 심어두었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다시 부활할 계획이다. 그것이 어이없게도 우리 집 다락방에 있던 것이다. (지구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찬 외계인이 숨어있는 곳이 고작 우리 집 다락방이라니...)

나는 그들이 깨어나지 않도록 소리를 죽인 채 조심스럽게 다락에서 내려왔다. 그것을 없애거나 어딘가에 신고를 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들이 계속 잠든 채로 있어만 준다면 이후의 일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니가 자기 방 컴퓨터를 켜면서 그 생명 결정이 깨어나고 만다.

 

깨어난 외계인들은 거대하고 꿈틀거리는(흡사 문어 다리와 같은) 존재로, 안방 천장을 뚫고 내려오고 있었다. 겁이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달음에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달리고 또 달리고 산 속 깊이 들어오자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지점까지 올라오고 나니 내가 버리고 온 사람들이 떠올랐다. 집에 있던 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왜 같이 나올 생각을 못한거지? 나 혼자 이렇게 도망치면 어쩌자는 건가. 이렇게까지 된 데 내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을 한 자루 쥐어들고 나는 다시 산을 내려왔다.

이미 마을 사람들은 외계인에게 영혼이 잠식당한 뒤였고 외형은 그대로이나 그 안의 존재는 자기 자신이 아닌 상태였다그들을 구하려면 그들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목을 차례차례 베어 나가면서 나는 앞으로 한 발작씩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목은 스폰지 덩어리 같은 느낌으로 잘려나갔다. 칼날이 닿자마자 탄력있게 벌어지며 작은 구멍들이 난 단면을 내보였다. 깨끗하게 잘린 단면을 보는 일은 꽤 즐거웠다. 칼을 휘두르는 행위는 나를 흥분시켰고, 더 이상 나는 사람을 구한다는 초기의 목적을 떠올릴 수 없는 수준으로 미쳐가고 있었다.

다시 그 복도다. 조용하고 아무도 있지 있지 않았던 그 복도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그 곳에서 칼을 휘두르며 사람들의 목을 베었고 마지막 교실로 점차 다가갔다. 여기서 살인을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제서야 내 판단이 틀렸을 지 모른다는 생각(목을 벤다고 해서 그들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것인가에 대한)을 하기 시작한다. 대체 무슨 근거로 살인이 구원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꿈에서 깨어나고 싶다. 이미 눈은 반쯤 떠진 상태였지만 살인은 계속되었다. 오후의 햇살이 안방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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