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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말하지 않는 훈련

by 늙은소 2010. 4. 1.

학교의 특성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학부시절 과제 발표할 일이 많았다. (인문대에서 진행하는 교양 수업의 경우에도 학생들의 발표를 유도하는 수업이 많은 편이었다) 전공수업의 경우는 정도가 더해, 이론수업은 조별 보고서 제출과 발표로. 실기과목은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프로젝트의 방향을 각자 발표하고 결과물 역시 학생들 앞에서 공개 평가한다.
이런 평가 시스템은, 과제를 낸 교수가 학생을 평가하는 것과 동시에 수업을 듣는 학생들 역시 서로의 능력을 평가하게 만든다. 누가 재능이 있는지, 누구의 감각이 뛰어나며 누가 촌스러운지, 노력을 많이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등등. 그 뿐 아니라 발표를 통해 개인의 언변과 카리스마, 지적 능력, 토론의 내공 같은 것이 아이들 사이에서 평가되곤 하였다.

그 시절 기억 중 하나. 참 답답한 선배가 있었다. 그의 발표시간은 대부분 해당 주제와 관련 없는, 준비 과정에서 겪은 일들로 채워지곤 하였다. 본래 주제가 다른 것이었으나 막상 하다보니 어디서 막혔네, 주제를 선정하고 자료조사를 며칠 동안 하였는데 결국 그 자료를 못쓰게 되었다는 아쉬움 등.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닌 땅을 파다 결국 시간에 쫒겨 황급히 파던 땅을 버리고 돌아와 아쉬워하는. 그래서 가끔은 그의 발표를 듣는게 괴로웠다. 질문을 하면 '다른 주제를 준비했다가 급히 바꾸는 통에..' 이런 식으로 이어지니. 결국 3학년이 되었을 무렵에는 어느 누구도 그의 발표에 추가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되었다.

그의 태도는 구차한 변명이나, 주어진 질문에 당황하여 말을 돌릴 재간과 같은 게 아니었다. 그는 엉뚱한 곳을 헤매는 사람이긴 하나, 거기서 가치있는 것을 가져올 줄 알았다. 문제는 그가 가져온 것이 길을 떠난 이유와 맞지 않는게 대부분이라는 점. 1950년대 북유럽 산업디자인 경향을 발표해야하는데 1970년대 미국 자동차 산업에 빠져있다 온 꼴. 그러다보니 정작 자신이 발표해야할 주제는 뒷전이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50년대 북유럽을 대충 넘겨버린 다음 70년대 미국 자동차 사업과의 연관성을 슬쩍 껴넣은 뒤 2/3을 온통 자기 하고 싶은 말로 채우는 식. 


말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 하지 않는 것.

이 문제를 생각하면 그 선배가 떠오른다.
김치전 하나는 정말 자신 있게 만드는 사람에게 김치찌개를 만들라는 주문이 떨어진 경우. 김치찌개에 김치전 조각을 수재비처럼 띄운 요리가 만들어진다. 어떻게든 자신 있는 것을 해내보이고 싶은 마음에 일을 오히려 그르치는 사람들. '말 실수'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지 않은가. 가장된 이간질이나, 속마음을 들킨 말실수와는 전혀 다른, 떠오른 착상을 그냥 버리기 아까워 앞 뒤 맥락과 맞지 않게 억지로 끼워넣은 말의 실수담.

인터넷에서 목격하는 악플 중에는 저런 유형의 말이 제법 많다. 말 하지 않는 훈련이 되지 않아 말하여진 것. 추측성 루머나 음모론 같은 내용이 특히 그렇다. 갑자기 떠오른 착상을 그냥 지워버리자니 아까운 마음이 들어, 기어이 글로 내뱉는 것. 그 내용이 사람이 할 법한 상상일 때 오히려 무서운 힘을 지니게 된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지' 라는 의문이 든다면 그것은 악플이 되지 않는다. 누구나 언뜻 떠올릴 법한 추측이 글이 되었을 때, 그게 사람 죽이는 무기가 된다.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한 것을 버리는 것, 그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생각한 것을 애써 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 것을 말하는 훈련은 많은데 말 하지 않는 훈련은 없다. 생각한 것을 그 즉시 말하게끔 유도하는 기술은  (트위터, 스마트폰, SMS, 메신저 등등 참으로 많지 않은가) 날로 진화하기만 하니.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 말하여지는 세상은 결국 도래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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