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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오만과 편견_1995 BBC 미니시리즈

by 늙은소 2010. 4. 3.

1.
오만과 편견 : BBC 미니시리즈(1995)


1995년작 BBC 6부작 미니시리즈를 밤 11시에 보기 시작해, 해 뜰 무렵 마무리지었다. 책은 가지고 있었으며(민음사)-몇 년 간 읽지 않은 채-, 케이블 TV에서 몇 번이나 영화를 방영했음에도 계속 미뤄두었던 [오만과 편견]. 6편을 며칠에 걸쳐 나눠보려던 애초의 결심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상당히 흥미진진한 전개가 이어졌다. 경박하고 저속한 가족과 주변인들은 드라마 보는 내내 적응하기 힘들 정도. 그 점이 오히려 시대와 문화, 공간을 초월하는 편재적 고통이려나.

여주인공인 엘리자베스에게 '다아시'나 '위컴'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탈 시대적 존재다. 이들은 18세기의 마감이 임박한 빅토리아 시대를 100년 후에나 존재할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무의미한 예절과 격식에 얽메인 시대에 숨막히지 않으려 애쓰며.

엘리자베스의 활달하고 거침없는 솔직함이나, 다아시의 관찰자적 시선과 침묵아래 사색하는 습관. 위컴의 즉물적인 손익계산 능력은 지극히 근대적이다. 그러나 이들이 근대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시대에 등장할 사람들의 감성이 이들에게 이미 존재하며, 그 이유로 이들은 서로에게 매혹당한다. 그녀와 위컴 사이에 존재한 호감은 새로운 시대를 예감한 이들의 설레임이기에, 그녀에겐 그 순간이 드물고도 귀하게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위컴에게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희롱하던 뭇여성과는 다른 존재이며, 그는 그녀로부터 자신이 이해되기 바란다) 그녀는 위컴에게 새로운 시대적 인간을 보았던 것이며, 다아시나 위컴 역시 엘리자베스를 통해 유사한 동질감을 느껴으리라. 

가문과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 위컴은 그런 시대의 속성을 개의치 않을 뿐 아니라, 체면 때문에 사실을 은폐하려는 이들을 역이용하기까지 한다. 위컴이 시대의 룰 바깥에 존재한다. 어떤 면에서 그는 근대적이다. 애석하게도 근대의 장점이 아닌, 근대의 병폐만이 그에게 이식되긴 했지만 말이다. 

이것은 꽤 흥미로운 점을 시사한다. 미래성은 그것이 현재가 되지 않는 한 늘 미지의 영역에 속하며, 그 때문에 과거는 미래를 잘못 판단하기 쉽다. 병폐나 부작용 따위가 미래 그 자체로 이해될 가능성. '방종'을 어른의 증거로 여기는 아이는 일찍 어른이 되고싶은 마음에 어른들의 '방종'을 흉내낸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병폐가 이식된 남자가 하나의 매력으로, 새로운 공기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늘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자각을 일찍 경험한 이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동질성에 목마른 나머지 자신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대상을 만나게 되었을 때 이성을 망각하기 쉽다는 점이다. 다르다는 사실에만 집중하여 윤리나 가치, 선과 악의 기준을 거둬버림으로써, 상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오류.

위컴이 근대인의 즉물성과 욕망을, 다아시가 근대인의 우울과 고독을 짊어지고 있다면, 엘리자베스는 중반 이후 탈시대적이며 탈근대적이기까지한 자세로 변화한다. 더비셔 여행에서 펨벌리를 방문하였을 때, 풍광에 압도된 그녀는 자연과 합치되는 길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게 된 듯 하다. 경박하기까지 한 가족들과 주변인들에 대한 그녀의 시선 역시 미묘하게 변화하는데, 타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해법이 그녀에게 주어진다.


2. 어쩔 수 없이 연상되는 '작은 아씨들'의 이미지

드라마를 보며 [작은아씨들]을 계속 떠올렸다. 가족 구성원도 비슷한며 자매에게 부여된 캐릭터와 외형이 몹시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작은 아씨들]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 속되지 않고 순수하며 정이 넘치는 인물이라는 것. 왠지 [작은아씨들]의 작가가, [오만과 편견]을 읽으며 적잖이 짜증을 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인물의 성격을 개조하여 쓴 소설이 [작은아씨들]인가 싶다.


3.
나홀로 '제인 오스틴 주간'을 맞이하다


시작은 이렇다. 지난 주말, 가볍고 즐거운 영화를 한 편 보면 기분이 좋아질 듯 하여 [맘마미아]를 선택해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콜린 퍼스의 비중이 기대보다 적었고 영화 말미에 커밍아웃까지 하니 '충족'되지 않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1995년 방영되었던 BBC판 [오만과 편견] 6부작에 손을 댔다.

영화도, 책도 보지 않은 상황. 중반 이후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드라마를 보니 왜 이리 재미있는지... 결국 쉬지 않고 하루만에 6편을 모두 봐버렸다. 그 다음날에는 민음사판 [오만과 편견]을 읽기 시작하였고, 다시 그 다음날에는 2005년작 영화 [오만과 편견]을 찾아봤다. 원작과 드라마, 영화를 비교하며. 재미로는 드라마>원작>영화 순. 2005년 [오만과 편견]은 국내 상영 당시에도 끌렸던 작품인데, 원작을 읽고 더구나 드라마까지 보고나니 영화의 부족함이 눈에 띤다. 화면 구성이나 동선이 뛰어난 서너 장면이 기억에 남지만, 신분의 격차를 지나치게 과장하여 표현하였으며 감성이 보다 촉각에 집중되어 있다. 팸벌리 저택에서 '다아시'의 초상화를 바라보던 장면은 '다아시의 흉상'을 만지는 것으로 바뀌며,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 역시 신체적 접촉에 보다 집중한다. 무엇보다 영화는 '원작'에서 출발해 각색한 게 아니라 '드라마' 시나리오를 재 편집한 인상이 강하다. 

영화, 소설, 드라마를 통해 본 [오만과 편견]은 매우 재미있긴 하지만, 그것을 '좋은 작품'이라고 말 하기는 어렵다는 게 현재 심정이다. 그래서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1996년 작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선택했다. 너무 오래 전에(그리고 어릴 때) 본 영화여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는데, 이제 다시 보니 상당히 좋은 작품이다. 16인치 TV로 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15년만인가. 동양인인 '이 안'에게 영국 시대극을 맡겼다는 사실이 의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만 해도 '이안'의 필모그래피가 이정도로 대단하게 될 줄은 몰랐었는데...

이번에는 2005년의 [오만과 편견]을 1996년 [센스 앤 센서빌리티]과 비교하였다. 2005년의 [오만과 편견]은 색감도 훌륭하고, 기억할 만한 시각적 인상이 제법 여럿 존재한다. 실외의 전경을 인물을 따라가며 촬영하다가 그 자리에서 실내로 파고 들어가는 장면은 공간 내외부의 조명이 큰 편차를 보이기에 과거에는 촬영하기 어려운 기술 중 하나였다. 기술 발전이 몇몇 과제를 해결하면서, 최근 몇 년간 신인감독이 좋은 화면을 만들어내는 사례를 자주 목격하곤 한다. 하지만 그 느낌은 뭐랄까. 르네상스에서 마니에리즘으로 진행되기 직전, 거장들의 작품을 분석하여 그들과 비슷한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들이 대거 등장한다. 미켈란젤로가 그림 직한 작품을 제법 무난하게 잘 그리는 화가와 같은? 어쩐지 요즘 그런 영화들이 많다. '좋은 영화인 척 여겨지는 그냥 그런 영화'들의 범람.

[센스 앤 센서빌리티]와 비교하니 그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이 장면 멋있지 않습니까?'라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인식하는 2005년 [오만과 편견]에 비해.


4.
오만과 편견 - 브리짓 존스의 일기 - 러브 엑추얼리 - 센스 앤 센서빌리티


95년 BBC 드라마인 [오만과 편견]은 그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는데, 콜린 퍼스가 물에 뛰어드는 장면(원작에는 없다)이 특히 인상적이어서 이후로도 콜린 퍼스는 다른 영화에서 물에 빠지는 장면을 자주 연기해야만 했다. [오만과 편견]을 참고하여 현대적으로 뒤바꾼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영화편에서는 아예 '마크 다아시'역을 콜린 퍼스에게 맡긴다. 그 영화에서도 콜린 퍼스는 수 차례 물에 빠진다. 심지어 [러브 엑추얼리]에서도 호수에 뛰어드니, 배우로서 좋기만 한 일도 아닌 듯.

BBC [오만과 편견] - [브리짓 존스의 일기] - [러브 엑추얼리 ] -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연결하면 겹치는 배우가 상당하다.

1. 콜린 퍼스는 95년 [오만과 편견]에서 '다아시'를 한 다음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마크 다아시로 나왔으며, [러브 엑추얼리]에서도 유사한 케릭터를 연기한다.
2.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오만과 편견'의 위컴에 해당하는 역할로 나완 '휴 그랜트'는 [센스 앤 센서빌리티]에서 엠마 톰슨의 연인으로 나오며, [러브 엑추얼리]에서 영국 수상역을 맡는다.
3. [러브 엑추얼리]에서 휴 그랜트의 누나로 나온 '엠마 톰슨'은 [센스 앤 센서빌리티]에서 휴 그랜트와 사랑하는 사이로 나오며, 그 영화를 각색하였고 2005년 [오만과 편견] 각색에도 일부 참여한다.
4. [러브 엑추얼리]에서 엠마 톰슨의 남편역을 맡은 '앨런 릭맨'은 [센스 앤 센서빌리티]에서 엠마 톰슨의 여동생을 사랑하는 브랜든 대령으로 등장한다.
5. [센스 앤 센서빌리티]에서 엠마 톰슨의 어머니로 나온 '젬마 존스'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브리짓의 엄마로 나오니...
재미있는 관계도가 만들어질 듯.


5.
1700년대 말에서 1800년대 초의 영국 경제와 재산상속에 관한 법률, 부동산 소유권을 여성이 지닐 수 없다는 점 등이 결국 이러한 결과물의 원인이 되었다는 생각에, 어제부터는 '사생활의 역사'를 읽기 시작했다.

5권 세트로 구매해두길 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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