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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복권 당첨의 부작용

by 늙은소 2010. 4. 19.

지난 주 수요일, 기차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걱정에 깊이 잠들지 못했다. 꿈에서 꿈을 꾸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이중 꿈의 함정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나는 잠이 들었고 복권 당첨 번호가 선명히 각인되는 꿈을 꾼 후 깨어났다. 그 번호 그대로 복권을 사야 하는데 설마 당첨이 될까 싶어 어물쩡 하루를 넘겨버렸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그 번호가 사실임이 입증되고 말았다. 꿈 속에서 어찌나 이를 한탄하였는지. 그러나 모든 것은 꿈이었다.

기차 안에서 꿈에서 꾼 꿈 속의 번호가 정확히 어떤 수인지 떠올려보려 했다. 이미 그 수는 6개에서 8개로 늘어났다. 22~26 사이에 숫자가 3개가 나왔는지 4개가 나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고, 7과 9가 혼동되니 복권에 6개의 숫자를 정확히 맞춰 적기 어렵게 되었다. 편의점을 찾아가 다소 부끄러워 하며 8개의 숫자를 대략 조합하여 6개로 압축한 다음 복권을 구매했다.

일요일 낮, 복권이 생각나 이 주의 당점 번호를 조회해보았다. 막상 번호를 알아보려니 당첨여부보다, 꿈에서 나온 숫자가 정말로 엇비슷하게(5개 이상) 맞아 떨어지면 앞으로의 나는 어찌 살게 될 것인가 덜컥 겁이 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미리 알 수 있음을 강력하게 입증하는 증인이 될 판이 아닌가. 당첨이 되면 이보다 더 무서운게 뭐가 있겠나. 1등이라도 당첨되었다간 사이언톨로지교에 가입을 하든가, 초능력 테스트를 받아야겠다며 미국에라도 날아가야 할 상황이다.

가정해보자. 어느 평범한 하루. 복권 당첨의 염원을 안고 있던 소시민들의 꿈에 그 주의 복권 당첨 번호가 일제히 나타난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 번호로 복권을 구매하였고, 그 주가 다 지나지 않아 이 사실(많은 사람들이 같은 숫자가 등장하는 꿈을 꾸었다는)은 TV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기에 이른다. 디씨의 로또갤 같은 곳을 통해 이 일은 대단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미 그 번호로 복권을 구매한 사람의 수가 만명을 넘었으므로, 설령 1등이 된다고 하더라도 대단한 금액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당첨 번호가 발표되는 TV생방송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같은 숫자가 등장하는 꿈을 여러 사람이 꾼다는 것도 충분히 놀라운 일인데, 만약 그 번호가 당첨 번호로 확인된다면. 그 사건 이후로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좋지 않은 꿈을 꾸었으니 오늘은 차를 놓고 가라는 어머니의 걱정이 좀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예외로 하자.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꿈에서 보았다는 이유 만으로 결별을 선언하는 여성의 결정에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어지겠군. 복권 번호 사건이 그 후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앞으로 한 동안 꿈의 예지능력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고, 간혹 그 때를 그리워할 것이다. 미지의 존재가 꿈을 통해 알려준 것일까. 아니면 당첨에 대한 기대감이 증폭되어 몇 사람들의 무의식이 연결되었던 것일까. 

그 날 이후 꿈에서 숫자를 본 사람들은 복권을 반드시 사들여야만 직성이 풀렸고, 그와 동시에 자신과 같은 숫자를 본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인터넷에 들어와 확인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문제는 그 때문에 타인의 꿈에 나온 숫자를 게시판에서 본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꿈에서 같은 숫자를 보게 되었으니.. 동시는 아니어도 며칠에 걸쳐 같은 숫자를 꿈꾸는 사람들은 등장하고야 말았다. 문제가 있다면 그 숫자가 당첨번호로까지 나오지는 않는다는 사실. 그럼에도 몇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고, 개인의 무의식이 초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정부가 개입하여 고의적으로 당첨 번호를 조작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꿈에 나온 숫자로 복권을 사는 것도 참 만만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복권은 어찌됐냐고? 묻지 말라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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