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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계량기 보는 남자

by 늙은소 2010. 4. 24.

블로그 이웃되는 분의 글을 읽던 중, 전기 계량기를 외부에 노출하며 사는 삶이 낯설어졌다.

전에 살던 오피스텔은 전기와 수도, 난방, 온수 계량기가 모두 집 안에 있어 한 달에 한 번 이를 기록해 제출해야 했다. 이곳은 복도형 아파트로 집집마다 복도에 계량기가 노출되어 있다. 누구나 다른 집의 전력 사용량을 확인하는 게 가능한 구조다. 거주인이 집을 비웠을 때에도 검침원이 자기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계량기를 외부에 노출시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전력이나 수도, 난방, 온수 사용량'같은 정보가 비밀이 보장되어야 할 사적 정보의 영역으로 취급될 가능성은 없는지, 그것을 감추기 바라는 이들이 있다면 그 속사정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그래서 '계량기 보는 남자'를 상상한다.

그는 취미 삼아 남의 집 계량기를 슬쩍 훑은 후, 그 안의 사람들을 상상하는 남자다. 자신의 집 전기료가 생각보다 많이 나온 어느 날, 그는 원인을 확인코자 전화를 한다. 이웃에 비해서는 그래도 적은 편인데 왜 그러냐는 말에 발끈해 전화를 끊은 후, 아파트 같은 동, 같은 평수에 사는 이웃들의 계량기를 훑어보기 시작한 것이다. 자녀 수도 같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맞벌이인데다 아이들의 나이까지 비슷한 403호는 한 달에 전기를 얼마나 쓰는지. 가족 수는 같으나 애 엄마가 직장을 나가지 않는다던 506호는 어떤지. 아내는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돌아올 때면 506호 여자처럼 자신도 살림만 하며 애들 키우고 싶다는 한탄을 하였고, 우리 부부가 늦을 때면 506호에서 애들 저녁을 챙겨주기도 하였으니.. 고마우면서도 가끔은 아내의 잔소리가 그 집 때문인 것 같아 은근 짜증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오븐으로 쿠키나 빵을 굽고, 치킨도 그럴 듯하게 구워서 식탁에 올린다고 하더니 애들 말이 사실인가 싶게 506호는 우리 집보다 많은 전기세를 내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약속 시간에 남보다 적어도 20분, 많게는 한 시간 가까이 일찍 도착하는 남자가 아니었다면. 혹은 그가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과 단 둘이 대화를 나누는데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 남자였다면. 그는 계량기 보는 취미를 그리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부하직원 집들이나, 장례식 참석, 먼 친척의 결혼식까지. 어딜 가든 그는 누구보다 먼저 도착했다. 이 장소에서 사람들을 계속 기다리는 게 좋을까, 근처를 돌아다니다 사람들이 두 세 명 올 때까지는 나타나지 않는 게 어떨까. 지난 봄, 김대리의 돌잔치에 함께 가자며 사람들과 약속을 잡았다가 일행이 늦게오는 바람에 미스최와 단 둘이 40분을 기다렸던 생각을 하니 역시 후자를 선택하는 게 나아보인다. 그래서 그는 계량기 보는 남자가 됐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남는 시간 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며 노출된 계량기가 어디 없는지 찾아다니는 남자.

그는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일수록 계량기 확인이 용이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거주용으로 지은 오피스텔 중에는 계량기가 전혀 노출되지 않는 게 많다는 것도 알게 된다. 어떤 건물은 고리로 된 걸쇠가 달린 철판으로 계량기를 가려놓기도 하는데, 여는 것은 쉽지만 조그마한 덮개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잠긴 문을 열면서까지 그 안의 숫자를 확인하는 것은 왠지 죄를 짓는 것 같아, 그럴 때는 검침원이 제대로 잠그지 않은 다른 집 계량기를 찾아 자리를 옮겼다.

어느날. 비슷한 이유로 계량기를 훑어보던 중, 이해할 수 없이 높은 숫자의 전기 계량기를 발견한다. 마침 그곳은 자신이 그 날 초대된 바로 그 집이다. 계량기는 누적된 숫자만 높은 게 아니라, 빠르게 숫자가 바뀌고 있다. 지금도 저 문 안에서는 전기가 빠르게 소모되고 있음을 계량기는 그에게 알려준다. 그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집 안에 들어섰을 때 자신이 무엇을 보게 될 지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 정도로 전기를 사용하는 가전제품이 뭐가 있을까? 에어컨을 틀기에는 아직 쌀쌀한 날씨. 노모의 방에는 전기 보료가 있고, 아이가 방에서 TV를 켜 놓은 채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으며, 손님 접대로 정신 없는 주부가 믹서기를 돌리며 냉장고에서 쉴 새 없이 음식을 꺼내고 있으려나. 가스레인지만으로는 요리시간을 댈 수 없게 되어 전기프라이팬으로 고기를 굽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 풍경이 어찌나 정신 없는지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진이 빠진다. 마침 일행이 도착하고, 그는 자신의 상상과 현실이 얼마나 다를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선다. 그런데 집은 생각한 것 보다 비좁았고, 이렇다할 가전제품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음식은 이미 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식구가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집 주인은 '세 식구인데, 아들은 지금 학원에 가 있어서 밤 늦게나 돌아올 것'이라 대꾸한다. 오디오 매니아라 트랜스 같은 것을 사용하나 싶어 몇 가지 사적인 질문도 건네보았지만, 소득이 없다. 안주인을 돕는 척 주방까지 찾아가 오븐을 슬쩍 만져본다. 방금 사용한 듯한 온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남의 집에 찾아온 주제에 이 문 저 문 열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궁금해진 남자는 미칠 것 같다. 닫힌 안방문이 사실은 대형 냉동고라도 되는 게 아닐까. 아파트에서 벼 농사를 짓던 남자를 TV에서 본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 저 문을 열면 비닐 하우스처럼 뜨거운 조명이 이글거리고 그 아래에서 무럭무럭 옥수수가 자라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방을 세 놓았는데, 그 곳에 세탁소가 차려져 있는거다. 안방을 세 놓고, 그 안방이 세탁소로 운영된다니. 천정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옷걸이가 움직이고, '치익' 소리와 함께 뿌연 증기를 내는 다리미가 양복 바지를 다리고 있다. 땀을 흘리며 중년의 사내가 남의 집 안방에서 다림질을 한다. 별 별 상상 속에서 조바심이 난 그는 깜박한 게 있다며 집 밖으로 나가 계량기를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숫자에서 벌써 상당량이 올라가 있다. 계량기는 여전히 빠르게 회전한다. 다시 집에 들어가 흘끗흘끗 숨겨진 원인을 찾아보지만 소용이 없다. 별다른 전기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데도 저렇게 계량기가 빠르게 돌고 있다면, 틀림없이 전기세가 엄청나게 나올텐데. 미리 말을 해줘야 하나. 갈등하다 포기한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월말이 되어 세금고지서가 청구될 무렵. 답답해진 그는 그 집의 주인을 만나 세금이 많이 나와 죽겠다며 슬쩍 대화를 유도한다. 집 주인은 '사는 게 다 그렇죠'라 말할 뿐이다. 생각도 못한 거액의 고지서를 받은 남자가 지을 법한 표정을, 그는 끝내 보이지 않는다.

뭐 이런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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