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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순간이동 Vs. 인간복제

by 늙은소 2010. 4. 29.

* 사용한 이미지는 리뷰를 위한 것으로, 권리는 제작사에 있습니다.

'엔터프라이즈' 호의 승무원들은 순간 이동 기술을 통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한다. 그들은 이것을 '전송'이라 부른다. 이곳에 있던 내가 저곳으로 이동했음을 강조하기에 '전송'은 더할 나위 없는 표현이다. 그러나 기계가 전송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재조립을 위한 데이터 뿐이다. 그들은 어느 곳으로도 이동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기계는 신체 구성 물질을 스캔한 뒤 이를 데이터로 전환해 도착지점으로 전송한다. 전송기 위에 올라선 신체는 원자단위로 분해되며 비물질화가 진행된다. - 그들은 그렇게 소멸한다 - 그와 거의 동시에 도착지점에서는 전송된 데이터에 따라 새로운 신체를 구성한다. 여기서 무엇으로 신체를 만들어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분해된 원자단위의 비물질을 애써 전송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곳의 나는 사라지고, 저곳에서 다른 '나'가 태어난다. 

[스타트렉]에서 사용되는 순간이동 기술은 새로운 형태의 인간복제라고 볼 수 있다. 체세포를 수정란으로 만들어 인간을 복제하는 방식은 긴 시간을 요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가 지금의 내가 되기는 더욱 불가능하다. 나의 세포로부터 발생한 복제인간이 지금 내 기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니.. 그러나 [스타트랙]의 세계에서는 분해되기 직전의 기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복제인간이 만들어진다. 신체의 구성물질을 완벽하게 분석해 이를 그대로 재조합하면, 그 순간의 기억과 감정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게 이 세계의 순간이동 기술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순간'이나 '이동', '전송'은 핵심 단어가 아니며, 진실을 가리기 위한 위장에 가깝다. [당신은 지금 이곳에서 제거될 예정입니다. 우리는 즉시 당신의 복제인간을 만들 생각입니다. 그 복제인간은 자신이 '이동'했다고 믿습니다]라는 말을 감추기 위해 선택된 단어가 '이동'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상상해보자. 인간복제 기술이 완성 단계에 이른 미래의 어느 날. 순간이동 기술이 '인간복제' 산업을 위기에 몰아넣는 풍경을. 이건 마치 부르면 달려오는 공중전화를 개발하려는 찰나 '휴대폰'이 등장한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머리카락 하나로 복제인간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복제인간을 고속성장시키는 기술까지 갖춰놨더니, 난데 없이 인간을 원자 단위로 분해해 그대로 조합하는 기술이 등장하는 거다. 게다가 분해 시점의 감정과 기억까지 그대로 간직하다니. 평생을 인간복제에 힘써온 그 많은 인력과 산업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 아닌가. 이런 상황이면 인간복제 기업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로비스트를 고용해 이 기술을 '순간이동'에만 사용하도록 정부를 압력할 게 불 보듯 뻔하다. 데이터가 해킹을 당할 수 있다느니, 기억과 감정을 간직한 복제인간의 윤리적 위험성도 경고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용이 비싸고 제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인간 복제보다, 싸고 빠르게 '복제인간'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동기술에 사람들은 몰려들 게 자명하다. 그 때가 되면 싸게 만든 복제 인간의 '기억을 지워주는 암시장'같은게 형성되려나?

반대로 순간이동기술을 개발한 회사의 입장은 어떨까? 이들은 중요한 갈림길에 직면한다. 이 기술을 '복제'로 정의할 것인가, '이동'으로 정의할 것인가.  후자를 택한다면, '현재의 당신을 죽이고 복제인간을 만들어 대체하는 기술'이 아님을 알리고자 마케팅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 내부에서는 이 기술을, 생명복제나 제품의 대량생산으로 발전시키자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수익을 추구하는 주주와 이사진들은 저가의 인간복제와, 제품의 대량복제로 단기간 막대한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기술개발부서는 기술적 진보를 알리기 위해서라도 순간이동쪽으로 사업을 발전시키자 주장한다. 전자의 경우는 신기술이 기존에 존재하는 바이오공학의 일종인 양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으며, 이후 '순간이동'으로 사업을 전환하는데 저항이 따르게 된다. 처음부터 '이동수단'으로 인식하는 것과, '사형대'로 알던 것을 '이동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기 때문이다.

'순간이동' 기술을 전혀 다른 차원의 서비스로 제품화 하는 것도 생각해보자. 스캔과 분해, 조립 과정에 시간차를 둔다면 어떨까? 한 30년 쯤 시간이 흐른 뒤, 과거의 데이터를 불러와 나를 조립한다면 그것은 미래로의 시간이동이 될 터. 혹은 스캔은 하지만 나는 분해되지 않은 채 계속 살아가고, 시간이 많이 흐른 뒤 과거에 스캔해놓은 데이터를 활용해 나를 조립한다면? 어느 소설가를 상상해보자. 소년기의 방황을 주제로 글을 쓰는데 자신이 그 당시에 느끼던 감정과 혼란스러움을 제대로 표현할 자신이 없어진 작가. 그는 소년기에 스캔해 놓았던 자신의 데이터를 불러와 '과거의 나'를 복제한 다음, 복제된 과거의 자신과 대화하며 소설을 완성한다. 그런 식으로 소설을 쓸 때마다 자신의 과거를 복제하고 제거하는 과정을 반복한다면? 지금 스캔해놓은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악이용당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현재의 나를 스캔할까? 스캔해 놓은 데이터와 분해되지 않은 채 계속 살아가는 나를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한다면 그것도 가능한 일이겠지. [더 문]이 그런 영화다. 과거의 어느 한 시점의 기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스캔 데이터를 주기적으로 복제해 '3년 근무 기한을 채우라'며 달 기지에 보내놓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이야기. [프레스티지] 역시 같은 맥락에 놓인 영화다. '순간이동'으로 위장했으나 사실은 '인간복제'를 이야기하는 영화. 더불어 '내가 나를 살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영화.

'순간이동'기술의 몇몇 개념만 가지고도 영화로 만듦직한 이야기는 끝없이 나오니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는 할리우드의 한탄은 엄살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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