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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현실이 스릴러다

by 늙은소 2010. 4. 22.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웬만한 스릴러를 능가하는 요즘.

화요일 PD수첩이 수소폭탄이었다면, 오늘 보도된 추적 60분은 빙상장을 향해 레이팜탄을 투척한 셈이다. 전 국가대표와 가족, 전 현직 코치, 심판, 빙상연맹 관계자, 현 국가대표들이 저마다 주장을 하고, 서로 다른 말을 주고 받는다. 방송은 제목처럼 60분을 꼬박 할애하여 사건을 보도하였는데, 이제 나올까 저제 나올까 기다린 부분이 끝내 다뤄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연신 뱀의 다리만 쫓을 뿐이어서 대체 그 몸통과 머리는 어디로 갔는지 의아하다.

선수들 간 담합이 있으며 그것이 쇼트트랙계에서 관행처럼 여겨진다고 방송은 보도한다. 그런데 그 원인을 '우리나라 선수들의 기량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으로 일축하다니. '추적 60분'의 보도 태도는 폭탄은 던졌으되 뇌관은 직접 건드리지 않겠다는 전략으로 읽혀 여러 모로 아쉽다.

이정수 선수의 세계 선수권 출전 포기 압력 혐의를 받고 있는 코치는 '관중을 속이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상당히 억울해하며 반문한다. '그것이 속이는 것으로 보이느냐'고 말이다. 빙상 연맹 관계자는 대한민국을 쇼트트랙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일본을 비롯한 국가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지금의 결과를 강조하기 바쁘다. 그들로서는 담합 의혹이 불거진 지금의 상황이 꽤 억울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들의 사명은 대한민국이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하는 것이지, 좋은 스포츠맨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를 없애고, 그 자리에 입시학원을 세운 다음 쪽집개 강사를 채용해 대학 진학률을 전국 최고로 만들어 놓은 다음, 갑자기 학원 강사에게 '인생의 좋은 스승이 되어주지 못했다'고 힐난한 꼴이지 뭔가. 그러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본질은 무엇인가.
스포츠 정신의 회복을 과연 우리가 바라는가. 
그것이 설령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오더라도 신념을 굽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더 좋은 경기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쁜 결과를 맞게 되더라도 과정이 정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방송이 말하지 않은 핵심이 아닌가.

담합의 피해자는 국내 선수들만이 아니다.

순위 조작, 밀어주기 게임과 같은 담합은 결국 중국, 캐나다, 미국 등 외국 선수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벤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이러한 변화가 목격되었다. 이것이 더욱 진행되면 아마 다음 올림픽에선 중국과 미국이 연합하여 한국을 예선에서 떨어트리기로 뒷거래를 하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는 일. 당장의 승부를 위해 세계 쇼트트랙을 오염시킨 게 바로 우리인데, 어찌 피해자가 국내 선수에 그치겠나.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거래와 담합이 아예 룰로 받아들여질 판이다. 준준결승에서는 '가'국과 '나'국이 뒷거래를 하고, 준결승에서는 '가'국 선구 'A'가 '나'국 선수 'B'와 연합해 서로 자국의 라이벌을 떨어트리는 전략을 짤 수도 있겠구나 싶다. 이 정도면 올림픽에 나갈 게 아니라 증권계나 정치계에 진출하는 게 좋을 수도...


세계 선수권과 올림픽 선발전을 문제시 하면서도, 이 사안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나 파장은 어떠할지, 세계 쇼트트랙 연맹 측에 의견을 구하지 않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내 집안 일을 바깥에는 알리지 못하겠다'는 방송 보도 지침이라도 있는 것일까. 세계 선수권에서의 부정은 국내 문제로 그칠 일이 아니다. 세계 연맹이나 해외 관계자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는 보도는, 빙상연맹이 내부 문제를 스스로 감사하고 이를 시정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검찰측 비리를 검찰이 알아서 조사하고 덮는 것과 뭐가 다른지.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 쇼트트랙 계에서 한국이 수모를 겪게 되더라도 이 문제를 국제적으로 공개할 생각은 가지고 방송을 만든 것인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스포츠 정신은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방송을 제작했다면 좋았을텐데... 반복되는 것이라고는 '세계 강국인 우리가 더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라는 구호 뿐이다. 우리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다른 국가의 선수들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 문제의 해결은 앞으로도 요원하지 싶다. (국제 문제임이 분명한데도 국내 문제로만 취급하다니)

방송은 내내, 세계 1위를 한 선수가 대회에 나가지 못하였음을 호소하고, 마찬가지로 세계 강국으로 불리는 양궁 대회와 쇼트트랙을 비교한다. 추적 60분은 시작의 1분부터 마지막 60분까지 '1등이 1등 자리를 지켜야 한다' 전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핵심은 지금의 1등 자리가 아니라, 설령 잘못된 관행을 철폐하는 과정에서 1등 자리를 놓치게 되더라도 올바른 기초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기량이 그리 좋지 않은 선수가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더라도, 그리하여 금메달 가능성이 낮아지게 되더라도 규정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과 국민, 미디어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때가 오긴 올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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