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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steampunk

by 늙은소 2010. 4. 12.

1.
80년대 중반, 충격의 미니시리즈 'V'가 방영되었다. 드라마 방영 내내 남자애들은 몇몇 여자애를 '다이애나'라 부르며 공격했다. 한 반에 다이애나가 너무 많아지자 그 다음에는 다이애나 1, 다이애나 2... 이런 식으로 번호가 매겨졌다. 우리 반만 해도 9번까지 다이애나가 차고 넘쳤다. 공격은 단지 호칭에 그치지 않아, 몇몇 겁없는 남자애들은 다이애나로 불리는 여자애 앞에서 쥐를 삼키는 연기를 시연하기도 했다. 성적 매력이 충만한 다이애나의 얼굴이 벗겨지며 파충류의 피부가 드러났을 때,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어쩌면 소년들은 다이애나를 향한 성적 욕망에 수치심을 느꼈고, 자신을 속인 그녀에게 분노를 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평소 호감을 느끼면서도 이를 표현하기엔 두려운 여자아이들에게 '다이애나'라는 별칭을 붙여야 했던 것인지도.

'V'의 대전제는 '공룡이 덧없이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 진화했다면 지구는 어찌 되었을까'에 있다. 역사는 '만약'을 허용하지 않지만, 인간은 늘 역사에서 만약을 꿈꾼다. 2차 대전 일본이 패하지 않았다면, 핵무기 개발이 독일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로마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가정은 적어도 인류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무너트리진 않는다. 그러나 공룡의 멸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포유류인 인류가 지구를 차지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우연의 산물인 것 같아 편치 않다. 적의 불운을 틈타 약삭빠르게 승리를 훔쳐낸 듯한 기분이랄까? 만물의 영장이라 스스로 칭하기에는 그 정당성에 의혹이 남는다. 공룡이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우린 아예 등장하지도 못할 뻔 한 게 아닐까? 이런 원죄(이것도 원죄라면 원죄다)의식이 드라마 'V'에 깔려있다. 역사가 제대로 진행되었더라면 파충류가 지구를 지배하고 있을 터. 

[혹성탈출] 역시 이러한 죄의식이 깔려있다. 역사 뿐 아니라, 생물학적 진화과정에서 있어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류 이전의 생물 종에 대해 죄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현재의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이러한 죄 의식은 피할수 없는 것인지. 혹은 수정란의 발생과정이 생물종의 진화와 일치한다는 학습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거쳐 온 다른 종에 대한 원죄의식을 심어놓은 지도 모르겠다. 생각은 끝도 없이 펼쳐진다.

2.
SF장르의 일종으로 Steampunk가 있다. 증기기관이 석탄에서 석유, 다시 원자력으로 에너지원을 바꾸며 발전하지 않고, 증기기관의 구조 안에서 더욱 발전을 거듭했다면 어떤 기술적 결과물이 나올지 가정하는 게 Steampunk다. SF나 판타지, 고딕 호러와 같은 장르 문학이 시작한 19세기가 증기기관의 시대였고, 이 장르의 선구자들은 자신의 시대안에서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 미래적 도구를 창안해낸다. 뿐만 아니라 테슬러나 에디슨과 같은 인물이 시대의 공기를 기술의 발전에 들뜨게 만들었으니, 그러한 흥분을 되살리며, 동시에 고전적 향취를 느끼기에 Steampunk만한 장르도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전을 거듭한 미래를 가정하는 것이 '사이버펑크'이며, 유전공학기술의 발전은 '바이오펑크'가 된다. 작년말 개봉했던 영화인 [셜록 홈즈] 역시 '스팀펑크'에 해당하는 기술을 선보이며 속편의 가능성을 남겨놓았다.  

3.
'스팀펑크'인가 '사이버펑크'인가 하는 구분보다 사실 눈길이 가는 곳은, '과거의 어느 한 부분이 스스로 기술적 완성을 이루었다면 어찌 되었을까'라는 가정법이다. 이것을 서구 과학 기술에 한정시키지 않고 의미를 확장해보자. 중국의 무협이나 한의학을 이 시각으로 포용하는 게 가능하다. 공중부양이나, 주화입마 같은 개별 기술에 그치지 않고 중국 무술이 정신과 육체, 공간과 심지어 시간까지 아우르는 성취를 이루었다면 어떤 세계가 등장하였을까.

동어반복처럼 보이던 중국 무협은 장예모의 [영웅]에 이르러 평행우주의 일종인양 새로운 과거를 상정하기에 이른다. 그곳에서 무술은 이미 기술적으로 완성되어 있다. 강호는 더 이상 강호가 아니며, 몇 사람의 고수는 역사의 축을 뒤바꿀 만한 경지에 이른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의 전통 건축과 요괴, 전설을 빅토리아 시대의 기술과 결합시킨 작품을 완성해내곤 한다. (그 때문에 스팀펑크의 예시로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거론되기도 한다) 하야오의 세계에서 일본의 전통은 서구와 지나칠만큼 유기적으로 결합한다. 쇼군의 성에 빅토리아 시대의 장식미술이 아무 거리낌 없이 결합한다거나, 유럽의 어느 소국가에 일본 무사가 버젓이 이렇다 할 눈길을 받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는 세계. 하야오의 작품은 '일본적인 것'이 세계와 결합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완성체다. 그곳에서 일본이 세계를 지배하지도 않지만, 더 이상 서구인들의 '타자'로 소외되지도 않는다. 그저 세계의 일부인 채로 섞인 상태. 그 것이 하야오가 구축한 '가정법'이다.

4.
어쩌면 구글 어스나 다음 로드 뷰와 같은 프로그램이 새로운 기술과 결합하며 발전해나간 결과가 '순간이동'의 다른 해석이 될 수도 있으리라. 스마트폰의 증강현실이 투시력에 가 닿을 수도. 스마트폰에 장착된 기술이 더욱 발전한 상태로 인간에게 이식된다면 어떨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태양의 온도변화와 현재 기온을 바로 알 수 있으며, 밤 하늘을 바라보며 눈에 들어온 별을 허블 망원경으로 직접 본 영상으로 대체하여 본다면. 거리를 지나가며 본 여성의 옷이 어떤 소재로 되어 있으며 어느 브랜드의 상품인지 바로 알게 된다면. 초능력을 갖추는 것과 별 다르지 않을 듯 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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